수치심? 버려도 그만인 감정
내가 나를 존중하면 사라지는 마음
수치심(羞恥心)
스스로를 부끄러워 느끼는 마음이다. 수치심은 자아와 자존심의 연장에 있는 개념으로, 수치가 되는 행동을 할 경우 느끼는 것이다. (출처:위키 대백과)
"한 달 반 만에 오신 것 같은데 그동안 머리가 많이 자랐어요."
"그러네요. 반 곱슬이라 더 지저분하게 보여요. 곱슬만 아니어도 덜 그럴 텐데 도저히 두고 볼 수 없네요."
"왜요, 고객님 머리 같은 곱슬은 돈 주고 하려고 하는데요. 자연스럽게 넘어가는 거 축복받은 겁니다."
"하하 그런가요? 근데 저는 왜 적응이 안 될까요. 아마 얼굴이 커서 더 그런가 봐요."
"에이 별말씀을 다 하시네요."
"2달에 한 번 온 게 벌써 10년 째네요."
"시간 정말 빨리 가요. 처음 고객님 본 게 결혼 전이었죠?"
"그랬죠. 웨딩 사진 찍기 2주 전이었죠. 머리 자르러 아무 곳이나 갔다가 망치는 바람에 이렇게 원장님과 인연이 이어졌죠. 원장님이 그때 머리를 소생시켜 준 덕분에 그나마 사진다운 사진으로 남길 수 있었네요."
"저도 그 덕분에 고객님과 긴 시간 인연을 이어올 수 있었지요."
(미용사-일정한 자격을 가지고 사람의 머리나 피부 따위를 아름답게 매만지는 일을 직업으로 하는 사람.
(출처-국어사전) 미용사, 헤어 디자이너 등 다양한 호칭이 있지만 이 글에서는 '미용사'로 통일함)
평범하지 않은 머리 라인과 반 곱슬은 미용사의 남다른 기술을 필요로 했다. 가끔 초보 미용사를 만날 경우 이발로 인해 두어 달은 자발적 은둔을 해야 하는 경우도 있다. 그래서 미용실을 선택할 때 신중에 신중을 기하려고 한다. 아니, 평범하지 않은 머리는 핑계였고 낮은 자존감이 문제였던 것 같다. 20대가 되면서 미용실에서 머리를 자르기 시작했다. 그 당시 커트 한 번에 5천 원을 받는 파란 클럽에서 자르고 나면 도저히 두고 볼 수 없을 정도였다. 자르는 사람 마음대로 였다. 내 돈 내고 내 머리를 자르는 데 얼굴 들고 다니기 부끄럽다면 돈이 아까운 거였다. 그래서 돈을 조금 더 주더라도 미용실에서 자르자 마음먹었다. 문제는 대부분의 미용실에 미용사가 여자라는 거였다.
결혼 즈음 알게 된 미용사에게 나름 까다로운 머리를 맡기기 전까지 메뚜기 뛰듯 미용실을 찾아다녔다. 매장이 작으면 실력이 의심됐고, 미용사와 스텝이 많은 곳은 보는 눈이 많아 망설여졌다. 어느 곳이든 선뜻 들어가지 못했고 몇 바퀴를 빙빙 돌다가 겨우 용기를 내게 되었다. 입구를 들어설 용기는 시작에 불과했다.
"어서 오십시오. ##헤어숍입니다."
한 명이 선창 하면 동시다발로 매장 안 모든 스텝들이 한 목소리로 인사를 한다. 이때부터 내 눈빛은 초점을 잃는다. 또, 갈 곳을 잃은 두 발은 불안한 마음을 그대로 드러낸다.
"예약하셨나요?"
"아니요. 처음인데요, "
(예약을 안 한 손님이 돼버리자 눈동자가 흔들리기 시작한다)
"저희는 예약제라 예약 없이 오시면 대기 시간이 조금 있는데 괜찮으시겠어요?"
(얼마나 걸릴지 모르는데 잘 버틸 수 있을까? 그냥 간다고 할까.....)
"괜찮습니다."
"혹시 원하시는 선생님(미용사) 있으실까요?"
(처음이라고 말한 걸 못 들었을까? 어느 선생님이 괜찮은지 내가 물어봐야 하나?)
"아니요. 커트 잘하는 분이면 좋겠습니다."
(이미 기에 눌려 말끝이 흐려진다)
"가운 입고 여기서 잠깐만 기다려주세요."
(가운은 누가 챙겨주지? 여기 있으면 되나?)
그들의 기준에 따라 담당 미용사가 정해지면 보조 미용사가 멀뚱이 서있는 나를 안내했다.
"겉옷 벗어서 주시고 이 가운 입고 여기서 잠깐만 기다려주세요. 차 한 잔 준비해 드릴까요?"
(한 번에 하나씩 만. 겉 옷을 벗는 것도 어색하고 민망한데 가운을 입어야 하고 또 마실 차를 골라야 하는 것 까지 해내기엔 내 몸이 말을 듣지 않는다)
기다림의 시간이 이어진 뒤 지정된 자리에 앉게 된다. 지금부터는 또 다른 어색함이 시작된다.
"이발하신지는 얼마나 되셨어요?"
"아~ 저요! 한 달 반 정도 된 것 같은데요."
"특별히 원하는 스타일이라도 있으세요?"
"그런 것 없는데요. 옆 뒷 머리를 너무 짧지 않게만 해주세요."
"머리 기장은 이 정도면 될까요?"
"나~ 네 그 정도면 될 것 같습니다."
대화는 여기서 끝난다. 미용사의 성향에 따라 말을 거는 분도 있고 그렇지 않은 분도 있다. 이발하는 내내 한 마디도 안 하는 편이 오히려 낫다. 간혹 어색함이 싫어서 인지 말을 많이 하는 성향인지 모르지만 이런저런 말을 거는 미용사가 있다.
"식사는 하셨어요?"
(주로 주말 오후에 다 보니 점심은 이미 먹었고 저녁은 먹기 전이라 어느 걸 기준으로 말해야 할지 잠시 망설여진다)
"이발하고 가서 저녁 먹어야죠."
"주말인데 어디 안 다녀오셨어요?"
(갔다 왔다고 하면 꼬치꼬치 물을까? 그냥 안 갔다고 하는 게 나을까?)
"아~ 그냥 근처 공원에 잠깐 갔다 왔어요."
단답으로 이어지는 대답이 별로였는지 더 이상 질문은 이어지지 않았다. 어색한 침묵 속에서 이발은 이어진다. 거울 통해 눈이 마주치는 어색함을 피하기 위해 시선은 항상 먼 산을 보거나 땅으로 향해 있다.
서비스를 받는 동안 주변을 보면 남자 손님이 미용사나 스텝들과 자연스럽게 대화를 나누는 모습을 보게 된다. 내 눈에 보이는 그 손님은 행동 하나도 당당해 보였다. 먼저 말을 걸기도 하고, 유머를 건네는지 웃음이 이어지는 걸 보면 대화에 여유가 있어 보였다. 나도 저 손님처럼 여유 있게 대화를 나눠보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하지만 그들에게 내가 어떻게 보일지 의식하게 되니 내 행동의 기준이 '나'에서 '상대방'이 되어 버린다. 상대방이 나를 어떻게 볼지는 상대방만 알 수 있다. 내 행동이 어색해지고 소심 해지는 건 상대방이 나를 어떻게 볼지 '짐작'하면서 그에 맞추기 위해 스스로를 재단하면서 시작되는 것 같다. 스스로 당당하지 못하니 행동은 위축돼 보일 수밖에 없고 위축된 행동이 혹여 상대에게 불편을 주지 않을까 하는 걱정으로 이어지게 된다.
10여 년 함께 한 미용사는 어느새 대형 프랜차이즈 헤어숍의 점장이 되었다. 서비스를 받으려면 예약도 어렵고 비용도 만만치 않았다. 어쩔 수 없이 저렴한 곳을 다시 찾게 되었다. 집 주변 여러 미용실을 다니며 나와 맞는 미용사를 찾았다. 몇 곳을 다니는 동안 나는 어떻게 행동했을까? 여전히 부끄럽고 어색해할까?
이제는 그렇지 않다. 모든 행동의 기준을 '상대방'이 아닌 '나'로 옮겨 왔다. 나는 서비스를 받기 위해 미용실을 찾는다. 미용사는 당연히 나에게 서비스를 제공해 줄 의무가 있다. 나는 그저 수많은 손님 중 한 명일 뿐이다. 말을 걸어오면 대답할 수 있는 만큼만 하면 된다. 대화가 이어지지 않는다고 어색해할 필요 없다. 미용사는 자신의 일에 집중하고 있다고 생각하면 그만이다. 나도 내 머리가 어떻게 변하고 있는지 지켜보면 그만이다. 그러다 여유가 생기면 한 두 마디 주고받으면 그만이다. 가운을 건네는 것도, 음료수를 제공받는 것도 당연한 과정이라고 받아들이면 그만이다. 그들의 서비스를 감사하게 받으면 그걸로 충분한 거다. 내 행동이 어떻게 보일지 고민하고 어색해하고 부끄러워하는 건 아무 쓸모없는 걱정이었다. 그런 걱정은 말 그대로 개나 줘버리면 해결될 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