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을 구하기 위해 오늘도 빨간약을 삼킨다
영화보다 더 영화 같은 직장인 이야기(1)
8시 50분.
출퇴근 기록기에 '출근' 버튼을 누르고 지문을 대면 "출근하였습니다" 그녀의 낭랑한 목소리가 들린다. 직장인으로 변신한다. '변신' 하면 토니 스타크가 최첨단 슈트를 입으면서 '아이언맨'이 되거나, 부르스 배너가 미친 듯 발작하며 입고 있던 옷을 모조리 찢으며(몸이 커져도 속옷은 그대로 입고 있는 건 과학일 풀어어야 할 숙제다) 괴력의 초록색 '헐크'가 되는 걸 상상하게 된다. 그들의 변신은 웬만한 적의 공격으로부터 자신을 지키고 엄청남 힘을 이용해 지구를 구하게 된다. 나의 변신은 지구를 지키는 것도, 상상할 수 없는 힘을 갖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반대다. 수많은 적(?)의 공격으로부터 무방비가 되어 영혼마저 털리게 된다.
책상엔 두 대의 모니터가 나를내려다 보고 있다. '007 스펙터'의 요원 'Q'가 007의 작전을 돕기 위해 현란한 손놀림으로 여러 대의 모니터를 능숙하게 조작하는 장면과는 비교안 될 만큼 초라하지만, 내 밥벌이를 위해 두 모니터를 오고 가는 나름 현란한 솜씨를 발휘하는 데는 부족함이 없다.
두 대의 모니터를 돌리고 있는 본체는 '분노의 질주:더 세븐'에서 천재 해커 '램지'가 해킹한 '신의 눈'처럼 인공위성을 이용해 원하는 어디든 누구든 찾을 수 있을 만큼의 막강한 사양을 갖고 있진 않지만 기안서를 만들고 자료를 검색하고 간간이 쇼핑하는 데 막힘이 없을 만큼의 처리 속도를 과시하며 3년째 책상 밑 지키고 있다.
2주 동안 공들인 기안의 결재를 받아야 한다. 이순신 장군이 단 12척으로 330척의 왜군에 맞서 싸운 해양 전투사에 길이 남은 명량대첩을 앞둔 비장함에 견줄만한 각오를 갖고 담당 임원의 책상으로 출격한다. 서류를 검토하는 임원의 손이 바쁘다. 나를 겨냥한 질문들이 머릿속에서 만들어지는 소리가 들린다. 기선을 제압하기 위해 첫 질문부터 강력하다.
"이 부분은 확실히 검토한 거 맞나? 내가 아는 숫자와 다른 것 같은데 설명해 줄 수 있을까?"
"안 그래도 작성하다 보니 이전에 자료가 잘못되어 있어서 이번에 바로 잡았습니다. 지금 보시는 숫자가 맞습니다. 이 내용은 이렇고 저 내용은 저렇게 됩니다."(편의상 구체적인 내용은 생략함)
거침없는 대답에 살짝 당황한 얼굴빛을 비쳤다. 그래도 굴하지 않고 여러 질문으로 공격해온다. 하나하나 대답하다 보니 전투력이 떨어진다. 일자진의 한쪽이 뚫렸다. 빈틈을 본 임원이 결정타를 날린다. 이순신 장군은 울돌목의 특성을 간파한 지략과 투철한 군인 정신으로 나라를 구했지만 준비가 부족했던 나는 결국 무너지고 만다.
"이 부분 보완해서 다시 결재 올려주세요."
태극기를 휘날리며 상대편의 고지를 탈환해야 살아남을 수 있는 형제간의 비극만큼은 아니지 고지를 빼앗긴 비참함에 패잔병이 되어 결재판을 들고 다시 자리로 돌아온다.
2주 동안 야근에 주말까지 출근하며 준비했는데 다시 원점이라니. 눈 앞에 빨간약과 파란 약이 있다. 빨간약을 먹으면 직장이란 현실 속에서 남아 지난 2주 동안 했던 일을 다시 반복할 것이고, 파란약을 먹으면 가슴 안 쪽에 고이 넣어둔 봉투를 던지고 내가 있어야 할 자리를 찾아 이상의 세계로 떠날 것이다. 아내와 아이들 얼굴이 홀로그램이 되어 눈 앞에 떠오른다.
"여보~ 이번 달 카드 값 내일까지 보내줘야 해"
"아빠! 나 킥보드 사줘."
"아빠! 저녁에 치킨 먹고 싶은데."
'매트릭스'에서 네오는 빨간약을 먹고 현실 세계의 구원자가 되었다. 나도 우리 가족을 구하기 위해 빨간약 100알을 털어 넣고 다시 컴퓨터 앞에 앉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