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6학년이니 할 수 있지 않겠어? 서울도 아니니 한 번 가보라고 하지 뭐. 대신 조심해야 해."
"감사합니다. 엄마 아빠!"
둘째도 친구 집에 가기로 약속이 되어있었다. 아내도 둘째를 데려다주고 곧장 아는 언니를 만나러 간다고 했다. 그럼 나만 혼자 집에 남는다. 예상하지 못한 자유시간이 생길 것 같았다. 주말을 가족과 함께 보내도 이일 저 일로 분주하다. 세 끼 밥도 챙기고, 마트 가서 장도 보고, 청소에 빨래에 설거지까지 아내와 나눠서 하다 보면 쉬어도 쉬는 것 같지 않은 때가 많았다. 그렇다고 나 혼자만의 시간을 달라고 할 수도 없다. 아내도 일을 하기 때문에 힘든 건 마찬가지다. 그런 아내에게 나만 좋자고 시간을 달라는 건 눈치 보이는 짓이다. 아주 가끔 해야 할 일이 있거나 중요한 글을 써야 할 때면 양해를 구하고 내 시간을 갖긴 한다. 그래서 이렇게 아내와 아이가 약속이 생겨 자연스레 내 시간이 생기는 날이면 하늘에 감사할 일이다. 대신 겉으로 내색하는 건 주의해야 한다. 자칫 가족들이 오해할 수도 있다. 마치 가족들 때문에 내가 힘들어하고 있다고 비칠 수 있기 때문이다.
한 명씩 나갈 준비를 하면서 내 마음도 분주해지기 시작한다. 최대한 침착한 표정을 유지하면서 준비를 돕니다. 준비를 도우며 머릿속에선 가족들이 나간 뒤 무얼 하면 좋을지 떠올려본다. 이런 날은 뭐니 뭐니 해도 영화 한 편 보는 게 여유를 만끽하는 최선이라 생각한다. 가뜩이나 극장에 사람도 없으니 더없이 여유를 즐길 수도 있다. 얼른 어플로 영화 시간을 확인해본다. 아내와 아이를 보내고 부지런히 준비해서 가면 볼 수 있는 시간이 있었다. 그 회차를 보는 내 모습을 떠올리며 성심껏 아이들의 준비를 돕는다.
드디어 큰 딸이 나갔다. 곧 둘째와 아내도 뒤를 따라 나갔다. 텅 빈 집 나만 남았다. 아내와 아이들에게 감사의 마음을 마음으로 전하고 나갈 준비를 한다. 5분 뒤 현관문 비밀번호 누르는 소리가 난다. '누구지'. 아내와 둘째가 들어온다.
"왜 벌써와?"
"집 앞에 다 갔는데 10분 뒤에 도착한다고 그때까지 오라고 해서. 진작 말을 해줘야지."
"10분? 그랬구나......"
"나도 한 시간 뒤에 보자고 연락 와서 둘째 데려다주고 집에 왔다가 시간 맞춰 나가려고."
"아~~ 그랬구나. 약속시간이 한 시간이나 늦춰졌구나."
결국 영화를 보겠다는 계획은 싹을 틔우기도 전에 지고 말았다. 자주 오는 기회가 아니라 마음이 들떠 있었던지 가라앉는데도 시간이 필요했다. 실망하는 표정을 드러낼 수도 없었다. 그저 혼자 좋았다 혼자 실망하는 말 그대 쌩쑈를 했다.
일요일 아침. 호수공원을 한 바퀴 돌고 오는 시간만큼은 눈치 보지 않는다. 아내도 아이도 일어났을 때 안 보이면 으레 호수공원을 갔을 거라 생각한다. 같이 가면 좋지만 각자의 생활이 생기면서 이 시간마저도 함께하는 게 쉽지 않아 졌다. 이렇게 조금씩 서로의 시간을 인정해 가고 있는 것 같다.
여유롭게 한 바퀴 돌고 와서 씻고 나니 아내의 지령이 떨어진다.
"채윤이 비염이 잘 안 낫네. 약을 바꿔야 할 것 같은데 병원 좀 데리고 갔다 와줘."
정말(?) 좋은 우리 동네에는 1년 365일 쉬지 않고 문을 여는 소아과가 있다. 친절하신(?) 의사 선생님 덕분에 일요일 아침에도 아이들에게 양질의 의료 서비스를 받게 할 수 있다. 둘째와 같이 병원을 다녀오니 이젠 장을 보러 가자고 한다.
"당연히 마트를 가는 것도 내가 아니면 안 되는 거지. 얼른 갑시다."
장을 보고 돌아오는 길에 아내는 미용실로 향했다. 두 손이 모자라 옆구리까지 빌려 겨우 장 본 식재료를 집으로 옮겼다. 냉동 삼겹살, 각종 야채는 냉장과 냉동에 자리를 잡아준다. 과자와 가공 식품은 부식 칸에 잘 정리해 둔다. 과일은 바로 먹을 수 있게 씻어 놓는다. 아침을 먹고 담가 둔 설 거리를 한다. 비어 있는 밥 솥을 씻은 뒤 밥을 안쳐 놓았다.
일요일에도 큰 딸은 바쁘다. 친구 생일파티에 초대받아 갔다. 미용실을 다녀온 아내는 도서관을 가자고 조르는 둘째를 데리고 나갔다. 그제야 나도 쉴 수 있는 시간을 갖는다. TV 앞에 앉아 홈쇼핑을 돌려본다. 요즘 여름에 입을 만한 저렴하고 이쁜 티셔츠 세트를 찾는 중이다. 채널을 몇 바퀴 돌리고 나니 아내와 둘째가 돌아왔다.
"음료수를 그렇게 잔뜩 사 왔어?"
"어~ 오는 길에 채윤이 친구를 만났어. 같이 놀고 싶다고 해서 집으로 오라고 했어."
"그랬어. 금방 오겠네?"
"어~ 자기도 나갔도 올래? 집에 있으면 뭐해. 애들 노는 동안 자기도 하고 싶은 거 있음 하고 와."
"어어! 그래도 되는 거야?"
아싸!! 최대한 의연한 표정으로 다시 한번 아내의 의중을 묻는다.
"애들 두 어 시간은 놀 거니까 그때까지 편히 있다고 오면 될 것 같네."
어제의 하늘이 나를 버리지 않았다. 타이밍도 절묘했다. 어제 보려고 했던 영화 시간과 딱 맞았다. 가벼운 발걸음으로 당당하게 집을 나섰다.
커피 한 잔과 함께 두 시간 동안 마음 편히 영화를 즐겼다. 몸도 마음도 더없이 가벼웠다. 한껏 기분을 끌어올린 뒤 다시 집으로 향했다. 주중은 짜인 시간표대로 움직이는 직장인이다. 주말은 주중에 못한 일들을 해야 하는 시간표가 있다. 시간표의 일들을 우선 해놔야 여유 시간을 가질 수 있다. 휴일이라고 아무것도 안 하고 무작정 쉬는 게 휴식은 아닌 것 같다. 눈뜨면 TV에 스마트 폰에 정신을 뺏기고, 졸리면 시간을 가리지 않고 잠을 잔다고 피로가 풀리는 것도 아니었다. 나처럼 맞벌이 부부에게 육아와 살림은 따로 떼어 놓을 수 없다. 또 누구 한 사람만의 몫도 아니다. 내가 쉬고 싶으면 상대방도 당연히 쉬고 싶다. 내가 하기 싫으면 당연히 상대방도 하기 싫다. 어느 한쪽에서 해주길 바라며 안 하고 있는 게 몸과 마음이 편해지는 건 아니었다. 각자의 역할을 정하고 맡은 만큼 할 때 나도 상대방도 여유가 생기는 거였다. 그러다 어제의 나처럼 뜻하지 않게 영화 한 편 즐길 수 있는 시간도 생기게 되는 것 같다. 선물 같은 시간이 주어졌을 때 느끼는 기쁨과 여유가 최고의 휴식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