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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이크M Nov 27. 2019

내가 굳이 퇴사하지 않는 이유

#1. [내가 굳이] 시리즈 _직장편


바쁘고 각박한 세상에서 굳이 무언가를 하거나 하지 않는 이유를 찾아 글로 풀어냅니다.
수많은 결정에 굳이 이유를 붙이고 의미를 부여할 필요는 없지만, 우리는 누군가에게 끊임없이 이유의 공감을 구하는 영혼이기에.


하고 싶은 일을 하는 것도 아니면서,
굳이 퇴사하지 않고 버티는 이유가 있나요?



1. 자본주의 시대를 배회하는 유령은 돈을 좇는다.


 ‘돈 때문에 일한다’는 사실을 부정할 사람이 있을까. 하지만 누군가가 나를 돈의 노예라 부르는 건, 지독하게 싫다. 나는 돈의 노예가 아니다. 단지 잘 살아보자고, 한 번 멋지게 죽어보자고 마음먹으니 어쩔 수 없이 나도 돈에 집착하게 됐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남들이 집착하는 딱 그만큼만.

 나는 노예보다는 차라리 유령에 가깝다. 다른 문제는 모두 접어 두고, 돈에 대해서만은 그렇다. 유령이 뭐 대단한가. 그저 남의 눈에 쉽게 띄지 않게 요리조리 피해 가며, 비밀스럽게 행동하면 그만이다. 그러면 신기하게도 돈이 따라온다. 가끔은 인간들 앞에 나타나서 내 존재를 증명하기도 하지만, 자주 보일수록 상대가 나에게 더 많은 걸 바라는 연유로 이내 다시 숨어버리는, 그런 '쫄보 유령' 말이다.



2. 내가 아닌 나로 존재할  있는 공간이 필요하다.


 가끔 나에게도 연기(performance)가 필요하다. 사람이 어떻게 진심으로만 살아갈 수 있나. 가끔 나를 철저히 숨기고 다른 모습으로 보이고 싶을 때가 있는 법이다. 때로는 강하게, 가끔은 약하게. 친하지 않은 동료에게 친한 척도 해보고, 싫어하는 상사에게 아부도 하고. 이 모든 역할놀이(role-playing)가 가능한 놀라운 공간이 바로 직장이다.

 잘 감췄다고 생각했던 내 진심을 들킨 것 같아 흠칫 놀랄 때도 있지만, 괜찮다. 어차피 한두 명이 전부다. 나라고 어찌 매번 연기만 하겠는가. 가끔은 진심을 알아주는 사람도 몇 명쯤은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니까. 단, 상대방 또한 나처럼 다른 사람인양 연기하는 상황일 수도 있으니, 그런 사람들만 조심하면 된다.



3. 매일 집에서 혼자  해먹을 자신이 없다.


 솔직히 내가 요리를 못하는 편은 아니다. 단지 ‘안’ 하는 거다. 가끔은 요리를 하고 싶기도 하지만, 삼시 세 끼를 다 해 먹을 자신은 없다. 내가 셰프도 아니고. 그렇다면 어떻게 내 소중한 식욕을 충족시킬 수 있을까.

 그렇다. 나에겐 직장이 있다. 요리하지 않아도 아무 거리낌없이 밥 먹을 수 있는 곳. 심지어 세 끼를 모조리 해결할 수도 있는 — 물론 회사에서 해결하는 끼니가 늘어갈수록 몸은 망가지겠지만, 대단한 곳이다. 가끔 시간이 모자라서, 혹은 엄청난 속도로 밥을 욱여넣는 하마들과 같이 먹느라 밥을 ‘먹지’ 못하고 ‘마실’ 때도 있다. 그래도 내가 끼니를 거르면 무슨 일 있는지, 아픈 건 아닌지 걱정해주는 따뜻한 곳이기도 하다.



4. 밤과 주말의 가치를 놀랄 만큼 끌어올려 준다.


 만약 내가 회사에 다니지 않는다면, 밤이 돌아오는 것을 이렇게 행복해 할 수 있을까? 이토록 간절하게 주말이 오기만을 기다릴 수 있을까? 직장은 늘 경계의 문제를 품는다. 퇴근 전과 퇴근 후의 일상, 출근해야 하는 평일과 하지 않는 주말 같은 경계 말이다. 우리는 경계의 한가운데에 서서 부단히도 줄다리기를 하며, 피곤과 휴식 각각의 절대량을 저울질하는 존재였던가. 저울질을 멈출 수 없는 이유는 누적된 피로 끝에 찾아오는 휴식의 달콤함이 강한 중독성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멈출 수가 없다. 절대 포기하고 싶지도 않다.

 문제는 경계가 명확하게 분절되어 있지 않다는 사실이다. 모든 저울질은 여기서부터 시작된다. 만약 퇴근 시간이 정확하게 지켜진다면, 정해진 시각이 되자마자 동시에 모든 직원이 벌떡 일어나서 퇴근을 한다면, 이보다 더 명확하게 경계가 나눠질 수는 없을 것이다. 나는 아직 그 적확한 경계를 찾지 못했다. 아니, 영영 찾을 수 없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그것을 찾을 때까지, 밤과 주말의 달콤함에 현혹되어 마치 무언가에 홀린 사람처럼 팽팽한 줄다리기를 계속하고 있을 것이다.



5. 당당하게 명함을 집어던질 용기가 아직은 없다.


 ’어느 직장에 가도 이상한 사람 한 명은 꼭 있다’는 말은 거의 진리의 영역에 다다른 것으로 보인다. 과학 용어로는 “또라이 질량 보존의 법칙”이라 한다. 어떤 일을 해도 딴지를 걸고, 시도 때도 없이 불필요한 회의를 하는. 이해를 구하는 배려심 자체를 마뜩잖아하는 부류의 사람 말이다. 또 한 가지, 직장의 시계에는 분명 문제가 있다. 바늘이 잘 움직이지 않는다. 배터리를 교체해도 마찬가지다. 가끔 누가 바늘을 다시 뒤로 돌려놨나, 한두 번 의심해 본 게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속감, 이 어쩔 수 없는 불안의 종결자인 소속감이 내 발목을 잡는다. 밋밋하고 볼품없는 명함이지만 자꾸 쳐다보니 정겹고 멋있어 보이기까지 한다. 가끔 명함을 땅에 확 집어던져 버리고 싶을 정도로 스트레스를 받기도 하지만, 나는 잘 참는 편에 속한다. 혼자 동떨어져 어느 곳에도 소속되지 못한다는 공포, 노벨문학상 수상작가인 '토니 모리슨'의 말이 속절없이 떠오른다.

 "공포가 지배하면 복종이 생존을 위한 유일한 선택이 돼. 나는 그거 하나는 잘했어. 얌전하게, 또 얌전하게, 또 얌전하게 굴었거든." (토니 모리슨, <하느님 이 아이를 도우소서>, 문학동네, 51쪽)



모든 이유의 중심에는 업(業)의 본질이 있다.



 모든 이유는 언제나 본질을 떠나서는 성립하기 어렵다. 본질을 탐하지 않는 자는 껍데기에 불과하다. 여기, 내가 생각하는 업의 본질과 가장 근접한 이야기를 하는 사람이 있다. 이 이야기를 끝으로 내가 굳이 퇴사하지 않는 이유의 공감을 구해본다.


 “같은 일을 해도 그 일의 경험을 통해 써 내려갈 수 있는 이야기는 사람마다 다르다. 얼핏 보아 파편적이고 불연속적인 경험을 통해서도 일관되고 의미 있는 이야기를 써 내려갈 수 있는 사람은 자기 기준을 가지고 있고, 그 기준에 맞춰 자기 일의 경험을 스스로 해석할 수 있는 사람이다.” (제현주, <일하는 마음>, 어크로스, 169쪽)





[내가 굳이] 시리즈 #1.

내가 굳이 퇴사하지 않는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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