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는 항상 소금으로 이를 닦았다.
아버지는 항상 소금으로 이를 닦았다. 죽염도 아니다. 그냥 소금이다. 가끔 엄마가 계란프라이를 할 때 그 소금을 넣기도 했다. 어릴 땐 몰랐지만 지금 생각하니 대단한 부부였다.
어느새 그때의 아버지 나이가 돼 버린 난 혼자 살고 있다. 이혼이었다. 29살을 넘기기 싫다고 했던 그녀는 3년 만에 이혼 서류를 가져왔다. 냄새가 난다는 이유였다.
별다른 재주가 없었다. 공부와 담쌓은 탓이다. 군대를 다녀온 후 돌아보니 세상은 공부로 가득했다. 공장도 자격증을 요구했고 어딜 가든 대학졸업 같은 나를 증명할 무언가를 바랐다.
그렇게 간 곳은 어판장이었다. 새벽, 항구에 들어오는 생선물량을 정리하고 경매가 이루어질 수 있도록 돕는 일이었다. 시키는 대로 하면 되는 간단한 일이었지만 그마저도 번번이 틀렸다.
"아이고.. 저 병신새끼, 저런 놈 누가 데려가냐"
고참의 푸념이 익숙해질 때쯤 난 조금 나아졌다. 들어오는 배만 봐도 무슨 생선이 있을지 알 정도였다. (물론 과장이다.) 3년이 지났을 때는 요령이 붙어 제법 혼자서도 많은 일을 처리했다. 천직이라고 생각했다.
그때부턴 옮기는 것 말고 소금도 쳤다. 경매 전 신선도를 유지하기 위해 얼음과 소금을 많이 필요로 하는데 생선마다 조금씩 달라 양을 정해놓는다. 별거 아닌 것 같지만 단시간에 고루고루 뿌리는 건 제법 손을 많이 탔다.
내 허리높이까지 쌓인 상자를 내리며 소금을 뿌렸다. 어쩔 땐 소금이 입으로 들어오는 경우도 있었다. 짠맛이 입안 가득 느껴질 때 문득 아버지가 생각났다. 바쁘다는 핑계로 명절이 아니면 보는 일도 없었다.
가끔 전화를 드리면 "뭘 내려오냐, 바쁠 텐데 일이나 해라"는 퉁명스러운 말을 들었다. 그게 응원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던 중 전처를 만났다. 내 장가 노래를 부르던 고참이 아는 사람 소개로 연결해 줬다. 그렇게 장가를 갔다.
아버지는 결혼식 날 아침에도 소금 어딨냐고 물었다. 치약 조금에 소금 가득. 그러나 항상 누런 이였다. 내 입 안에 가득 짠맛이 느껴졌다. 괜히 들리게 한 마디 했다.
"그렇게 소금으로 닦아도 이가 누렇소" 아버지가 칫솔질을 멈추고 날 보고 있었지만 난 몰랐다.
이혼은 무탈했다. 결혼만큼 고민도 없었기에 전처 입장에 맞춰졌다. 반반. 얼마 되지 않는 재산을 나눈 후 난 회사 근처 작은 원룸을 얻었다.
고민 없던 결혼만큼 부작용은 적었다. 전처 입장이 이해됐다. 다만 아버지한테 미안했다. 아들의 상견례에 결혼식에 없던 머리를 다듬고 평소보다 더 많이 소금을 쳐 이를 닦던 그 모습에 미안함이 몰려왔다.
그렇게 마흔아홉이 되던 해 아버지는 심근경색으로 돌아가셨다. 어머니는 시골로 돌아가 이모가 있는 곳에 터를 잡았다. 이사를 돕던 날 어머니가 화장실에 있는 소금통을 들고 한참을 바라보시던 모습이 생생하다. 엄마는 그 통을 들고 가셨다.
더운 여름. 평소보다 소금을 더 많이 쳐야 했다. 녹는 얼음 사이로 소금이 날아다녔다. 연신 흐르는 땀이 입 주변을 오가자 나도 모르게 닦아냈다. 입술 주변에 느껴지는 짠맛. 퉤. 그날따라 짠맛이 불쾌했다.
생선 사이, 내 손에 쥐어져 있던 소금. 비린냄새가 아닌 짠 소금기가 날 어지럽게 만들었다. 그 뒤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눈을 뜬 곳은 병원이었다.
과로. 탈수 증세도 있었다고. 다만 쓰러질 때 머리를 부딪혀 몇 주는 안정이 필요하다고 했다. 고참은 평소처럼 내 머리를 때리려다 아차 싶은 듯 손을 거뒀다. 그리곤 미안하다고 작게 말했다.
전처에게서도 연락이 왔다. 통상적인 안부였다. 1분 남짓 통화를 끝낸 후 입안에 짠맛이 느껴졌다. 씁쓸한 기분. 아버지는 왜 소금으로 이를 닦으셨을까. 마음 한 컨 남은 궁금함이었다. 엄마한테 전화를 걸었다.
입원 소식은 다행히 안 간 것 같다. (고참놈 고맙네) 그냥 전화했다고 말했지만 엄마는 이모들과 다닌 여행지를 죄다 말할 셈인가 보다. 피식 웃음이 났다.
"아, 엄마. 그 소금통, 그거 있잖아. 아빠가 이 닦을 때 쓰던 소금통. 그거 아직 있어?" 한참 떠들던 엄마가 뭔 소리인가 싶었는지 잠깐 말이 없다.
"있어. 왜?"
아냐. 그렇게 한참을 통화한 후 일 핑계로 전화를 끊었다. 궁금증이 두 개가 됐다.
여전히 덥지만 휴식이 약이 됐는지 현장으로 온 나는 평소처럼 일을 해냈다. 그 사이, 20대 중반쯤 된 녀석이 새로 들어왔다. 상자를 놓치거나 개수를 잘못 세는 일이 많은 그냥 서툰 친구였다. 나 같았다.
점심이 다 돼서야 물량을 모두 정리할 수 있었다. 휴우, 더위 사이로 한숨이 흘러갔다. 그때였다. "형님 여기..." 젊은 목소리 사이로 쑥 사이다 캔이 하나 올라왔다. 그 녀석이었다. "아, 어르신이 가져다주라고 해서요" 청년 뒤로 딴청 피우는 고참이 보인다.
"아, 더운 데 잘됐네" 덥석 받아 캔을 땄다. 탄산과 함께 달달함이 느껴졌다. 그러나 입술 사이는 여전히 짠맛이 가득했다. 실제 소금이 묻어서 인지, 아님 바다의 비릿함 때문인지 알 수 없었다.
소금 사이다. 그래, 알 것 같다. 아버지가, 어머니가 왜 그랬는지. 평소보다 짠 사이다의 맛에 난 한참을 그곳에 서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