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들은 모르는 내 추억
우연히 8년 전 여자친구와 연락이 됐다. 이상한 문제는 아니고. 어쩌다 보니였다. 필요한 내용을 우편으로 보내주겠다고 하자 본인이 찾아오겠다고. 머쓱함에 엄한 곳을 긁어댔다.
"오빤 그대로네?"
"이야, 나이 안 먹는 거 아냐? 너야말로 그대로네"
노래 <다시 사랑한다 말할까>나 <다시 시작해 보자> -둘 다 김동률 가수의 노래다- 같은 감성은 없었다. 눈 사이, 얼굴 주변, 그리고 살짝 보이는 흰머리가 대수는 아니었다. 다만 확 달라진 손의 주름만큼은 언급하기 어려웠다.
어떻게 지냈는지, 어떻게 살았는지보다 준비된 서류부터 건넸다. "미안, 바쁜데" 8년 전보다 부쩍 착해진 말투에 묘했다. 뭐든 사주겠다고 호언장담하자 곱창집을 가자고 한다. 여전하다. 식성은.
어느새 소맥도 먹는구나. 술을 따라주는 것도, 대화를 나누는 것도 모두 낯설었다. 8년 전 풋풋했던 그 아이는 잦은 이직에 뿔이난 우리나라 직장인이 돼 있었다. 피식. 오히려 그게 더 동료 같아, 한 잔 더 줬다.
30대 중반에 만난 그녀와 나는 뜨거웠다. 기회만 되면 서로를 탐했다. 적당히 큰 가슴을 자랑하듯 내밀던 그녀와 난 속궁합도 좋았다. 그녀가 오르가슴을 느낄 때 표정이 지금도 생생하다.
사업 실패. 큰 빚이 있던 난 서둘러 짐을 정리했다. 핑계일지 모르지만 미안했다. 결혼을 언급해도 모자랄 판에 거지라니. 통장에 0원이 찍힌 건 태어나서 처음이었다.
종종 우린 남남이었지만 만났다. 서로를 기다린 것처럼 탐닉했지만 끝난 후에는 미안함이 몰려왔다. 탐이 나는 가슴과 귀여운 얼굴, 그리고 그 표정. 난 연락을 끊었다.
몇 년이 지나 결혼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나름 괜찮은 능력쟁이였다. 아파트부터 덜컥 사 온 남편 소식에 그나마 위안이 됐다. 내가 아니어서 다행이었다고. 그리고 난 그녀를 지우고 살았다.
그래도 가끔은 늦은 밤 혼술 사이로 그녀가 보였다. 어땠을까. 내가 망하지 않았으면, 내가 떠나지 않았으면. 우린 지금도 뜨겁게 서로를 갈구하고 있었을까. 아니었겠지. 빈 술잔이 애처로워 소주를 부었다.
"이혼했어. 뭐 원래 내가 막 그르잖아"
"아.. 미안"
"ㅋㅋ 뭐래 나 남자 친구 있어! 신경 끄셔"
술잔이 오고 가며 들은 이야기가 마음 한구석에 쌓였다. 성격 차이, 손지검, 욕설. 사업이 부진해진 남편은 신경질적이었다. 둘 사이에 아이가 없는 것이 다행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혼과정에서 그녀는 다 포기했다. 결혼 전 가지고 있던 살림 조금만 가지고 도망치듯 서울로 올라왔다.
"걱정 마셔 오빠. 나 열심히 살고 있어."
면접도 최근에 봤다고 자랑한다. 자격증 공부도 하고 있고 요즘에는 그래픽도 배운다고 했다. 공백이 생기기 무섭게 그녀는 채우고 있었다. 이야기를 듣고 있을수록 내 속은 허해졌다.
술기운이 오른 그녀가 말했다. "난 능력 없어도 그냥 오빠처럼 생긴 사람이면 아직도 좋아하나 봐" 어이없는 표정으로 내가 보자 지금 남자 친구도 남들 눈에 못생겼는데 뭔가 지 눈에는 멋있어 보인다고 했다. 그럼 됐지. 난 더 캐묻지 않았으나 수다는 멈추지 않았다.
"근데 가끔은 뭔가 부담스러워. 꼭 나 같은 사람이야. 털털한 척 꽁해 있는 게 말이야"
"니가 그랬냐?"
"몰랐어? 이 사람 안 되겠네.."
순간 뭔가 지나간 듯했다. 어디선가 본 것 같은 표정. 그래. 8년 전 그 표정이다. 맞아. 내가 헤어지자고 할 때 그 표정이었다. 이내 표정이 바뀌었지만 그 찰나의 순간은 아직도 내 머리에 생생하다.
"알았어. 잘 가."
그녀는 그렇게 말하고 천천히 골목길로 사라졌다. 난 한참을 그러고 있었다.
"뭐 해 오빠?"
"응? 아냐.."
지하철 입구 앞 그녀가 서서 물었다. 입술을 살짝 물자 정신이 든 나는 한 손을 들어 가볍게 흔들었다.
"어서가 남자 친구 걱정할라"
"뭐래 나 신경 별로 안 써, 오빠 옛날보다 술 못 먹네..ㅋㅋ 늙었구먼"
"그르네, 늙었다 야. 어서 가"
양손까지 흔들던 그녀가 사라졌다. 난 한참을 그러고 있었다. 그리곤 뒤돌아 천천히 버스정류장으로 향했다. 우린 8년 전 그때 그 커플이 아니니깐. 난 아직도 부족하니깐. 머리도 심장도 차분하다. 오히려 이렇게라도 본 게 어딜까 싶다.
추억의 단맛이 사라진 입술 사이로 쓰디쓴 술맛이 올라온다.
그래 옛사랑이다.
버스가 오늘따라 늦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