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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겜노인 Feb 29. 2024

이별도시 - 1

이별로 만난 그 곳.

"이번 정류장은 본관, 본관입니다. 내리실 문은..."


스피커의 알림 소리에 눈을 뜬 A는 천천히 몸을 일으켜 하차문으로 향했다. 모든 게 귀찮은 듯 움직이고 싶지 않았지만 여기선 꼭 내려야 했다. 다른 사람들도 느릿느릿 일어나 속속 출구 근처로 모여들었다.


버스에 있던 사람 대부분이 이곳에서 내렸다.  덜컹 소리와 함께 문이 닫히자 버스는 조용히 안갯속으로 사라졌다. 막차에 어울리는 퇴장이었다.


A는 주머니 속에 손을 넣어 구깃구깃한 쪽지를 꺼냈다. 어딘지 모를 주소와 버스 정류장 번호, 그리고 이별특별시라는 단어가 보였다. A는 이게 무슨 의미인지 희미하게 알고 있다.


이별특별시. 언제부터인가 어떤 이별-실연이나 사별, 아니면 짝사랑의 끝-을 겪은 사람들 사이에서 돈 소문이었다. A도 처음엔 웃어넘겼다. 아내가 죽기 전까진.


A와 아내는 첫사랑이었다. 열렬히 사랑해 고백했고 따라다녔다. 그녀는 한사코 A를 밀어냈다. 추운 겨울 술을 잔뜩 마신 채 그녀의 집 앞에 비틀거리며 이름을 불렀을 때 겨우 그녀와 긴 대화를 할 수 있었다.


부끄러워서가 아니라고 하는 그녀. A는 왜 그러냐고 물었다.


"난 죽음이 예정돼 있어요"


무슨 소리일까. 그녀의 말을 이해하기 어려웠다. 불치병, 시한부 같은 단어가 떠올랐지만 술기운에 입 밖으로 꺼내지 못했다. 짐작한 듯 그녀가 먼저 말을 꺼냈다.


"언제 어디서 죽는 게 정해져 있다는 말이에요. 시한부는 아니에요."


살짝 띤 미소. 천사였다. A는 사랑한다고 말했다. 


"갸여운 사람. 알았어요"


그녀와의 결혼 생활은 행복 그 자체였다. 100% 완벽하다고 할 순 없지만 서로의 사랑만큼은 부족함이 없었다. 그녀는 A를 위해 뭐든 노력했다. 뜨개실을 배워 목도리를 만들어줬고 다양한 요리 레시피를 적어 스크랩해 줬다. 양말과 셔츠를 개는 법 같은 간단한 것도 적어놨다. 꼭 곧 사라질 사람처럼.


15년. 정확히는 그녀가 40살 되던 해. 그녀는 실종됐다. 전날까지 미소를 보여주던 아내는 내가 잠든 새벽 홀연히 자취를 감췄다.


난 회사도 관두고 아내를 찾기 위해 사방팔방을 뛰어다녔다. 경찰도 유능하다는 탐정도 아내의 어떤 흔적도 가져오지 못했다.


몇 달이 훌쩍 지난 시점에 A는 불현듯 떠올렸다. 죽음이 예고돼 있다는 아내의 말. 부지런했던 그녀는 어딘가 자신의 흔적을, 이유를 남겨놨을 것으로 봤다.


멈춰버린 듯한 집안을 샽샽히 뒤지기 시작했다. 아내의 손길이 닿은 곳이라면 뭐든지 수십 번 반복해서 봤다. 포기할 때쯤 그녀가 짜준 목도리가 생각났다.


끝 부분의 작은 돌기. 단순한 실수라고 생각했던 그 부분을 잡아당기자 아주 작게 접힌 쪽지가 나왔다.


그 내용이 A를 여기로 오게 만들었다. 아내는 여기에서 어떤 시간에 죽음을 맞이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었다. 조금이라도 시간이 있거나 다른 방법이 있지 않을까.. 무엇보다 아내가 사무치게 보고 싶었다.


늦었다고 생각할 수도 있었지만 포기하기엔 아내를 너무 사랑했다.


"지나갈게요"


다른 사람들의 움직임에 정신을 차린 A는 주변을 둘러봤다. 안개가 조금 옅어진 느낌. 그곳에는 예스러운 검문소-80년대 영화에서나 볼 법한-가 사람들을 맞이하고 있었고 그 뒤론 어렴풋 건물들이 보였다.


10여 명의 사람들은 검문소에 한 줄로 섰다. A의 머릿속엔 의심이란 단어가 떠올랐지만 몸은 본능처럼 줄 맨 뒤로 향했다. 검사는 단순했나 보다. 몇 분 뒤 A의 차례가 됐다.


"어떻게 이별했소?"

"네?"


빛에 가려 얼굴이 잘 보이지 않던 검문소 직원이 건넨 말이었다. 예상하지 못한 질문에 말이 막혔다.


"천천히 말해도 됩니다."

"아.. 아내가 실종.. 됐습니다."


살짝 끄덕인 것 같은데 빛 때문에 잘 보이지 않았다. '덜컹' 앞을 막고 있던 바리케이드가 빠르게 올라갔다. 오늘 본 어떤 동작들보다 시원한 움직임이었다. A는 그곳으로 향했다.


먼저 간 사람들은 보이지 않았다. 안개 때문인지 모르지만 평소보다 더 조용했다. 검문소가 보이지 않을 정도로 길만 걷기를 10여 분, 건물이 보이기 시작했다.


읍내. 안개 때문인지 모르지만 그리 높은 건물은 보이지 않았다. 그 사이의 가로등 불빛이 하나둘 모습을 드러냈다. 여기가 이별특별시일까. 난 어디에 있는 것일까라는 생각을 한 A였다.


그곳엔 아무도 없었다. 일부 창에는 불빛이 보였지만 형광등 같은 건 아니었다. 은은하고 약한 빛이 안개 사이로 출렁이듯 움직였다.


무섭다는 생각보다 '왜 여기일까'라는 생각이 더 컸다. A는 조금 더 안으로 들어가 보기로 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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