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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아울 May 14. 2019

낯선 이의 위로

위로와 위로의 교환


내가 그림을 지속적으로 그리게 된 시작은 공허에서부터였다.
공허의 시작은 보통 시답지 않은 고민들로부터 시작되었는데 이유를 찾다 보면 마지막엔 모든 질책이 나에게로 뒤엉켜 나를 더욱 힘들게 만들었고, 이렇게 이유 모를 허전함에 허덕이는 날엔 괜히 친구들을 만나 이야기도 털어놓아 보고 유흥을 즐기며 잊으려고 해 봤지만 괜찮아지는 건 그때뿐, 완전히 채워주진 못했다.

 

그렇게 혼자서도 견딜 수 있는 무언가를 찾는 도중, 내가 원래 좋아했던 그림을 끄적이기 시작했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내 모든 감정을 종이에 내려놓듯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6년 전  그림



그림이란 참 신기했다. 감정은 명확하게 글이나 말로 표현할 수 없었지만, 그림으로는 표현할 수 있었다.

그중 저 그림은 무려 6년이나 지났는데 지금 봐도 그때의 감정이 아주 고스란히 느껴진다. 물론 지금 생각하면 별거 아니었지만, 저당시엔 너무 힘들어 모든 것을 놓아버리고 싶었는데 무엇 때문이였는지 쓰지 않아도 사람들은 각자 자신만의 힘들었던 감정으로 그림을 해석했고 그것들을 하나 하나 읽으며 나의 이유모를 공허도 채웠었다. 그리고 그림도 하나의 소통이 될 수 있다는 걸 깨달았다.


나의 감정은 언제나 억압되어 있지만, 그림에서는 아니었다.

그냥 울고 싶은 날엔 더욱 펑펑 울고 있는 여자를 그리고 조금 언짢았던 일도 폭발하는 그림을 그리며 주먹으로 오락실 펀치기를 내리꽂듯, 스트레스를 풀었다. 게다가 누군가에게 말해야만 한 숨을 돌렸던 내가 사라지고, 혼자서도 나의 감정을 잠잠히 돌아보며 다스릴 수 있다는 게 든든하면서도 대견했다.


그렇게 창작의 즐거움에 빠져들어 매일 그림을 채널에 올리니 내 그림을 좋아해 주는 사람들도 늘어나고, 다양한 관심과 피드백들에 충만하고 행복한 날들도 잠시

 

시간이 지날수록 초반과는 달리 그림을 그리는 빈도는 점점 줄고 공허함을 채워주던 그림은 오히려 더한 공허함을 주기 시작했다.


예를 들면 '이렇게 그리면 잘 그려 보일까?', '사람들은 이런 그림을 더 좋아하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들면서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나만의 기준을 만들어 그림을 그렸고 그럴수록 즐거웠던 그림은 점점 불편해졌다.


시간이 더욱 흘러 다시 찾아온 공허의 빈 공간을 채우려 그림이 아닌 명확한 목적이 있는 업무에 몰두하며 그림을 잊어가던 중, 거의 멈춰있는 그림 계정에 새로운 DM이 왔다.





누군가가 나의 그림에 위로를 받았다.

알지도 못하는 사람이지만, 이 글을 보고 처음 그림을 시작했던 나의 모습들이 떠올랐다.

그랬다. 내 그림으로 나만의 위로가 아닌 다른 사람들을 위로할 수도 있는 거였다.

그림의 근본적인 목적을 잃어버린 채 허우적거리며 방황하며 직장과 사회생활을 핑계로 돌아보지 않고 걸어왔던 길에는 그림 없이도 꿋꿋하게 할 수 있다는 용기를 주긴 했지만, 그만큼 그림에 대한 갈망을 주었다.


이제 다시 그림을 시작해보려 한다.

나를 위한 그림도, 남을 위한 그림도 좋다.

나만의 공허뿐만 아니라 사람들의 외로운 마음을 그림 안에 담아 따뜻한 위로를 건네고 싶다.


그것이 곧 나에게 위로가 될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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