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정아울 May 28. 2019

분홍 택시

PINK TAXI PARTY

이 글은 몇 년 동안 나의 출퇴근길과 수많은 약속 시간을 지켜준 선량한 택시 기사님들께 바칩니다.


난 사실 택시 운전사를 좋아하지 않았다.
첫눈이 오던 날, 트렁크에 내 캐리어를 가지고 도망간 운전사, 타자마자 욕을 하거나 정치 이야기를 하던 운전사, 갑자기 손을 뒤로 뻗어 내 무릎을 만지려고 했던 운전사 등. 안 좋은 경험이 많았기에 택시 운전사가 말이 없으면 불안하고 말이 많으면 불편했다. 하지만 신비한 분홍택시를 만나면서 택시 운전사에 대한 나의 인식이 많이 바뀌었다.  


늦은 저녁, 같은 동네에 살던 친구에게 전화가 왔다.

너무 오랜만이라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수다를 떨고 있는데, "그냥 이럴 바에 우리 집에서 잘래?"라고 친구가 제안해왔고, 난 흔쾌히 수락했다.

그렇게 가장 편한 옷을 골라 입고, 친구와 같이 먹을 과자와 맥주를 가방에 가득 채운 후 택시를 잡으러 큰 대로변으로 걸어갔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택시 하나가 내 앞에 섰다.

그리고 문을 연 순간, 난 입이 떡 벌어졌다.


태어나서 처음 보는 택시 내부였다.

의자와 천장 모두 핫핑크색이었고, 시끄러운 음악 소리 가운데 활기차게 돌고 있는 미러봉 때문에 천장의 도트무늬들이 춤을 추고 있었다. 그 후 정신을 차리고 보니 선글라스를 낀 택시 기사님이 마이크를 잡고 "안녕하세요! 이런 택시는 처음이죠?" 라며 힘차게 인사하셨는데 난 놀란 채로 앉아 안전벨트를 단단히 맸다.



분홍택시는 출발했다.


기사님은 참 특이한 분이셨다. 신기하고 재밌지 않냐며 계속 말을 거셨고, 도라에몽 만능 주머니처럼 택시 안에 있는 빵, 음료수, 마이크, 향수(?) 등 신선한 아이템 자랑에 열중하셨다.

처음엔 잔뜩 경계했던 나도 해맑은 기사님 모습에 못 이겨 웃음이 터져버렸는데 문득 분홍 택시의 탄생기가 궁금해졌다. 이 기사님은 왜 이렇게 택시를 꾸미셨을까? 무슨 사연이 있었을까? 결국 궁금함을 못 참고 기사님에게 ‘도대체 왜 이렇게 꾸미신 거예요?’라고 물었더니, 선하게 웃으시며 대답해 주셨다.


"내가 즐거워야 손님도 즐겁고 또 손님이 즐거워야 내가 즐거운 거니까!”  


기사님의 대답은 너무 순수하고 해맑았다. 평범한 택시를 운행하다 노래가 부르고 싶어 지면, 마이크를 샀고 춤이 추고 싶어 지면 미러봉을 틀었다. 그리고 분홍색을 좋아해 분홍색이 잔뜩 있는 택시로 꾸미고 선물하는 것이 좋아 약속 장소를 가는 손님들에게 향기를 선물했다. 어찌 보면 '세상을 즐겨라'라는 건 머리로는 알지만, 실행하기 어렵고, 특히 일을 할 땐, 더욱 어렵다. 하지만 이 기사님은 자신의 일터를 좋아하는 것으로 꾸미고 스타일을 만들면서 일에서 오는 즐거움까지 찾은 듯 보였다. 게다가 기사님의 순수한 대답은 날 굉장히 즐겁게 만들었다. 그 당시를 떠올려보면 친구 집에 가는 것에 더불어 택시의 신선함과 쾌활했던 분위기가 나를 괜히 들뜨고 행복하게 만들었다.


TAXI PARTY


길고도 짧은 시간이 지나 목적지에 도착했을 때, 난 처음으로 기사님과 헤어지는 게 아쉬웠다.

그리고 그날 이후 시간이 꽤 흘렀는데 택시 문을 열 때 괜히 기대하며 분홍택시를 떠올린다. 특히 기사님의 인생 교훈 ‘내가 즐거워야 남도 즐거운 것'은 오래 마음에 남아 내 곁을 맴돌고 있다.


지지자 불여호지자 호지자 불여락지자 (知之者不如好之者, 好之者不如樂之者)

어떤 거에 대해 아는 사람이 좋아하는 사람보다 못하고 좋아하는 사람이 즐기는 사람보다 못한다


어찌 보면 제일 어려운 '즐겁게 하기'

하지만 모두가 즐겁고, 나도 즐겁기 위해선

분홍택시 기사님처럼 나만의 것들을 거침없이 찾아야 하는 게 아닐까?

오늘 하루도 제대로 즐겨보자.






매거진의 이전글 낯선 이의 위로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