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자주 자격에 대해서 자가 진단한다. 나는 현재 빈곤한 삶을 산다고 말할 자격이 있는가? 이런 맥락에서 마음 놓고 기뻐해도 될 자격이 있는가? 장애인의 삶에 대해 이야기할 자격이 있는가? 나를 보편적 20대 여성이라 지칭할 자격이 있는가? 누구보다 라이선스 팔이 직업군 - 의사, 변호사 등 - 을 싫어하는 내가 매 순간 자격을 재단한다는 건 모순적인 일이다. 선생님은 삶이 매 순간 모순을 견뎌내며 단단해지는 일이라고 했다. 그래서 나는 둘러싸인 모순 속에서 커피 한 잔의 여유를 즐기며 이상과의 괴리를 삶 속에 뿌리내려 고통이라는 거름을 주기로 했다.
친척 명의로 사업을 해 떼돈을 번 부모의 자식이 부모 수입 0원이라는 구실로 소득 2 분위가 나와 국가장학금을 받고 루이비똥 트렁크를 살 때, 엄마가 공무원이란 이유로 1원도 나오지 않고 학자금 대출을 받아야 하는 한 부모 가정의 자식인 나를 애써 외면했다. 세상이 원래 이런 거야, 라는 편리한 말에 아직은 동요되고 싶지 않아서 외면했다. '원래 그래'라는 말은 이론(Theory)을 넘어선 법칙(Law)의 권위를 갖는다. 그 누구도 감히 뉴턴의 만유인력에 도전하지 않듯 '원래 그래'라는 말은 변두리의 아우성을 손쉽게 뮤트한다.
'교수가 되지 못하면 공장에 가겠다'는 강남구 자가, 자차 소유 서른 살에게 사람은 가진 만큼 살면 된다는 말을 들을 때 나는 어떤 반응을 해야 하는지 잘 모르겠다. 프리랜서 도합 7년, 회사생활 3년의 경력을 갖추면 세상에 조금 더 무뎌지고 유연해질 수 있을 거라 착각했다. 나는 여전히 스물한 살에 생긴 생채기를 그대로 안고 날것의 눈물을 흘린다. 선생님 저는 왜 성장하지 못했죠? 성장이란 건 모름지기 저런 사람들의 말을 듣고도 가슴으로 욕하고 얼굴로 웃는 능력을 지니는 것 아니었나요.
이런 사람들과 매일 부대끼며 네 시간을 통근에 쏟아부은 후 퇴근해 나도 서울에 집 있으면 좋겠다고 툭 내뱉었다. 엄마는 이번 생에는 힘들 것 같다고 미안하다고 했다. 당신은 한순간도 최선을 다 하지 않은 적이 없는데 나는 그녀의 최선을 간편하게 무시했고 제때 사과하지 못했다. '어른'이라는 사회적 칭호는 자격 없는 내게 너무 빨리 주어졌다. 공부는 정말 불공평해. 공부가 사회계층 이동의 수단이 되었던 건 역사 교과서 속 허구의 텍스트일 수도 있다. 고백하자면 실은 나도 가지지 못한 것을 좇는 배부른 사람이다. 진실로 어른인 엄마를 두었고 그런 엄마가 온몸을 바쳐 일해 번 돈으로 마련한 집 한구석에서 먹고 잘 수 있다. 그런데 세상이 자꾸 가지지 못한 것을 갈망하게 만들잖아요, 선생님. 다들 조선일보 손자 같아요. 주변에 보이는 귀한 여자 어른도 국민의 힘 국회의원이래요. 어쩜 이래요?
에잇 씨발, 그래? 때려치워. 머리가 하얗게 뒤덮인 선생님 입에서 나온 비속어 하나로 원죄를 용서받았다. 선생님은 내가 가진 모든 감정의 유기체를 양심이라 이름 지어줬다. 이 거지 같은 세상에서 내게 조그만 양심이라도 있다니, 이 얼마나 축복받은 일인가.
선생님, 저 뭐해먹고살아야 할지 모르겠어요. 그게 진짜 고민이야? 네. 그게 진짜 걱정이야? 네, 그런 거 같아요. 너는 작가 해야지. 작가요? 저 재능이 없는데요. 야, 니가 재능이 없으면 누가 있어, 내가 알아. 나는 니가 이래서 좋은 거야. 선생님은 모든 아이들에게서 예쁜 모습만 골라 보잖아요. 그건 그렇지만 내가 너는 조금 더 좋아해.
마포구 신수동, 선생님이 떠난 자리에서 나는 생각한다. 나는 작가의 자격이 있는가? 아아, 서울은 참으로 잔인한 도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