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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홍산 Nov 13. 2020

하늘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는 퇴사

나쁜 놈 하나 없는 나쁜 놈들의 일터

"산! 이게 뭐야!"


나의 사수인 ㅈ은 사무실 한가운데서 쩌렁쩌렁 울리는 목소리로 나를 향해 소리쳤다. 대리님, 전 바로 당신 뒤에 앉아 있는데요, 문화시민처럼 이야기하실 수도 있을 텐데요 - 부질없는 마음의 소리만 되뇌었다. 일 평균 3번 지랄하는 ㅈ의 두 번째 지랄이었다. 젠장, 이번엔 또 뭐지? ㅈ이 내 모니터 뒤로 성큼성큼 걸어왔다.


"산! 뭐가 잘못됐는지 보여?"


아카이빙 작업 중이던 엑셀 시트였다. 특정 키워드가 포함된 뉴스 기사의 헤드라인을 긁고, 그 옆 셀에 해당 기사의 링크를 붙여놓으면 되는 간단한 문서 작업이었다. 폰트 종류도, 정렬도, 크기도 맞췄는데, 도대체 뭐가 문제인지 유추할 수 없었다. 나는 영문도 모르겠단 표정으로 ㅈ을 보았다.


"하... 야! 너 진짜 일 이렇게 할래? 하이퍼링크가 파랗잖아!!!!!!!!"

"그럼 통념적으로 하이퍼링크가 파랗지, 빨갛진 않잖아요? 다른 문서들도 보니까 하이퍼링크는 파랗게 해 놓으셨던데요."


지지 않고 대답했다. 클라이언트에게 보낸 문서도 아니었을뿐더러 완성된 문서도 아니었다. 사내 아카이빙용으로 과거 문서를 충분히 참고하여 작성 중인 문서였기에 나는 대답할 자격이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게다가 ㅈ의 이런 지랄이 처음도 아니고 말이다.


"파란색이 문제야, 파란색이. 하이퍼링크가 너무 파랗잖아!!! 덜 파랗게 하란 말이야!!"


나와 30cm 떨어져 서 있는 ㅈ이 300m 밖에서도 들릴 법한 목소리로 소리 지르는 행위가 납득이 되지 않았지만, 그것은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 도대체 너무 파란색과 덜 파란색은 어떤 파란색을 일컫는 건가? 시각디자인 업무를 맡은 나에게 '너무 파란'색과 '덜 파란'색은 업무에 도움이 되는 구체적인 피드백이 아니었다.


"덜 파란색이 무슨 색이에요? 칼라코드로 주세요. 일괄 수정 후 다시 보내겠습니다."


무미건조하게 대답했다.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대답이었다. 나는 '너무 파란'색을 덜 파랗게 만들기 위하여 색상값 조절, 채도 조절, 명도 조절 등을 통해 만 가지도 넘는 색을 제시할 수 있었고, 어떤 파란색이 그를 만족시킬 수 있을지는 돌아가신 나의 조상 조차도 알지 못할 일이었다.


"칼라코드? 너 나랑 장난해? 하... 나 너무 빡쳐. ㄱ대리!! 커피 마시러 나가자!"


그렇게 ㅈ은 ㄱ의 팔짱을 끼고 문을 박차며 나갔다. 시이펄, 오늘도 편하게 퇴근하기는 글렀구나. 사무실의 그 누구도 ㅈ의 행동에 대해 일언반구 하지 않았다. 그는 회사 내 이너써클의 중심, 태풍의 눈 같은 존재였기 때문이다. 나는 엑셀 프로그램에 있는 색상 프리셋 값 중 가장 '덜 파란'색을 하나 골라 문서를 수정하고 ㅈ에게 보내 놓았다. 카페에서 돌아온 ㅈ은 기분이 한껏 나아졌는지 나의 '덜 파란'색에 대해 더 이상 코멘트하지 않았다. ㅈ은 퇴근하는 나를 붙잡고 '여자답지 않게 그딴 옷 좀 입고 다니지 말라'는 지랄로 일 3회 지랄 시리즈를 마무리했다.


돈 버는 게 이런 건가, 모두가 이런 지랄을 하루에 세 번씩 당하면서 사는 건가. 매일 아침 9호선 당산역에서 선정릉으로 향하는 급행 지하철 속에 몸을 던지며 이대로 영영 선정릉에 도착하지 않길 기도했다. 9호선 무한루프 급행열차의 기적은 일어나지 않았고, 오전 8시 15분이 되면 난 어김없이 연두색 파티션에 둘러싸인 책상에 앉아 하루의 업무를 시작했다.


그 회사에서 일을 한 지 한 달이 채 되지 않던 시점부터 알코올 중독과 수면장애가 함께 찾아왔다. 거친 모래폭풍 같던 프리랜서 생활을 견뎌온 내가 이렇게 단기간에 무너질 줄 몰랐다. ㅈ은 어떤 의미로 대단한 사람이었다. 시간이 가면 갈수록 사무실에 앉아있는 행위까지도 괴로웠다. 가만 앉아있는데 저 밑에서부터 뜨거운 울음이 끓어올라 목구멍 주변에서 맴돌았다. 동시에 뜬금없이 눈물이 주룩주룩 났다. 이런 내 모습에 스스로 당황하기 일쑤였고, 그럴 때면 그냥 책상에 머리를 박고 크게 심호흡을 세 번 했다. 이 모습을 지켜보던 인사팀 팀장은 회사 근처 카페에서 잠시 이야기를 나누자고 했다.


좋아, 나의 회사생활을 바꿔볼 수 있는 처음이자 마지막 기회야. ㅈ의 부당한 갑질에 대해 차분하게 설명하겠어. 이런 결심이 무색하게도 카페에 착석한 나는 인사팀장을 앞에 두고 대성통곡을 하기 시작했다. 약 한 달 반 동안 쌓인 모든 화가 걸쭉하게 묻어있는 진한 울음이었다. 카페에 있던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나를 향했지만, 한 번 터져버린 울음은 멈출 생각을 하지 않았다. 젠장, 멈춰! 그만해! 나의 울화통은 나의 이성이 시키는 대로 멈추지 못했다. 인사팀장은 당황한 기색으로 나를 밖으로 데려나가 담배 한 까치를 쥐어주었다. 그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내가 다 울고, 담배를 다 피울 때까지 차분히 기다려줬다.


"제 사수가 저를 너무 괴롭게 해요. ㅈ대리가 싫다는 건 아닌데, 그러니까 ㅈ대리랑 잘 지내고 싶은데요, 방법을 모르겠어요. 그리고 제가 그런 부당한 윽박지름에 대해 언제까지 고분고분하게 받아줘야 할지도 모르겠어요. 사수면 일을 가르쳐줘야 하는데, 대리님은 저에게 일을 가르쳐주지 않아요. 실은 팀장님 앞에서 이렇게 말하는 게 무슨 소용이 있는지 잘 모르겠는데, 전 진짜 잘해보고 싶거든요. 근데 ㅈ대리가 너무 힘들어요."


인사팀장은 정리가 되지 않은 나의 말을 곰곰 씹어보고는 대답했다.


"ㅈ도 처음에 다 그렇게 일을 배워서 그래. ㅈ은 정말 좋은 사람이야. 산이 조금은 비뚤게 생각하고 있는 것 같아. ㅈ이 사람은 참 좋은데, 스타일이 산과 안 맞나 보다. 산도 조금 더 열린 마음으로 ㅈ에게 다가가 보는 건 어떨까?"


그 순간 인사팀장에게 ㅈ대리에 대해 안 좋게 말한 걸 후회했다. 결국 울음과 함께 내던져진 필사적인 외침은 '조직에 적응하지 못하는 직원'이라는 직원 평가로만 남게 되었다.


"산, 사수 ㅈ대리와 ㅂ팀장의 평가에 기반하여, 산과 더 이상 일할 수 없다는 결론을 내리게 되었어요. 퇴사 서류 작성하시면서 퇴사 날짜 저랑 논의하시면 됩니다. 이 빈칸에 '자발적 퇴사'라고 적어주세요."


퇴사 날짜는 5월 18일로 결정되었다. '자발적 퇴사.' 나는 그렇게 근무 3개월째 자발적 퇴사를 당했다. 퇴사 날짜를 정하고 나니 묵은 체증이 내려가며 한결 가벼워진 느낌이 들었다. 이제 ㅈ이 뭐라고 하든, 난 5월 18일만 기다리면 된다고 생각하니 출퇴근길도 이전만큼 괴롭지 않았다. 퇴사 서류를 작성하는 순간 나는 ㅈ이 좋은 사람임을 이해할 필요도, 그에게 마음을 열고 다가갈 필요도, 그와 잘 지낼 의무도 없었다.


물론 ㅈ의 괴롭힘은 퇴사 날까지 계속되었다. 30도의 뙤약볕이 내리쬐는  택시를   없는 거리에 위치한 곳들로 심부름을 보냈다. 월말 직원 생일파티를  때면 ' 앞으로 이거  먹을 테니 ~ 먹어~  이거  먹어야 ^^'따위의 말들을 하고 음식을 먹였다. 인수인계 서류를 작성하고  전체에게 공유했더니 개인 답장으로 '장하다'라고 회신하기 시작한 그는, 퇴사 날까지도 업무 메신저  나의 모든 결재 서류와 보고 자료에 '장하다'  글자로만 답했다. 나와 나의 가까운 친구들은 ㅈ대리에게 '장하다 ㅈ대리'라는 애칭을 지어주었다. 장하다, 장하다.


5월 18일은 생각보다 빨리 다가왔다. 책상 위의 짐을 집에서 준비해온 큰 가방에 대충 쑤셔 박고 후련한 마음으로 사무실 문을 마지막으로 나섰다. 나는 이렇게 나쁜 사람 하나 없는 나쁜 일터를 벗어났다. ㅈ은 객관적으로 나쁜 사람이 아니다. 그와 나는 서로에게 주관적으로 나쁜 사람이었다. 주관적으로 나쁜 사람들의 싸움에서 위계에 의해 나는 처절히 패배한 것이다. 조금 억울하지만, 이렇게 생각하기로 했다.


어쨌든, 하늘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는 퇴사였다. 2019년 5월의 어떤 조금 습하고 흐린 날을 기억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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