익수의 다음 참프루를 기다리며
망원동에 참프루라는 술집이 있었다. 협소한 사각형 공간 안에서 ㄱ자 테이블과 좁은 평상을 놓고 운영하는 1인 바 형태의 가게였다. 안쪽 벽면의 여닫이 문을 열고 들어가면 책상과 침대가 일체형 가구가 들어선, 익수가 씻고, 자고, 사는 아주 좁은 공간이 있었다. 익수는 참프루의 주인이었다. 아니, 익수는 다음 참프루를 그리고 있으니 '-ㅆ다'라는 과거형은 옳지 않다. 다시, 익수는 참프루의 주인이다. 7-8시 즈음 영업을 시작하고, 1-2시 즈음 영업을 마감했다. 1인 운영 체제라 실은 오픈과 마감은 오롯이 익수의 마음이었다. 7 to 1은 그의 일상을 규칙적으로 유지하기 위해 자신과 한 최소한의 약속이자, 참프루에 올 손님들을 위한 최소한의 안내였다.
참프루에서는 소주, 맥주, 그리고 다양한 양주를 팔았다. 참프루에서의 기억을 톺아보면 어떤 이유로 익수는 손님들이 소주를 먹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던 것 같다. 안주거리로는 프레첼 과자나 마카로니 과자, 그리고 그날그날 익수가 만들고 싶은 요리가 있었다. 또, 손님이 원하면 간단히 라면을 끓여주기도 했다. 실은 이것도 전부 익수 마음이었다. 참프루에 방문하는 손님은 그날 참프루에 있는 것을 먹어야 했다. 손님들은 그래서 참프루에 왔다.
망원동에 이사 온 지 얼마 안 됐을 때, 나는 그 좋다는 망원동의 매력을 누릴 줄 모르는 사람이었다. 어느 골목의 어디가 예쁘고 맛있는지 몰라서 당시 집 앞에 있던 김밥집에만 성실하게 갔다. 당시 망원동 주민보다도 망원동을 잘 아는 ㅇ팀장님은 나를 참프루에 데려갔다. 그는 내가 참프루와 그 공간을 운영하는 사람을 좋아할 것이라 단언했다.
그곳에서 익수를 처음 만났다. 익수는 허리까지 내려오는 아주 길고 찰랑거리는 머리카락을 가진 건장한 남성이었다. 그의 말투는 냉소적이지만, 그 내용은 뜨거웠다. 그는 요리를 만들어 손님에게 대접하는 걸 진심으로 사랑했다. 나는 그런 익수가 운영하는 그 공간이 퍽 마음에 들어 편한 차림으로 종종 참프루에 갔고, 나와 그는 꽤 빠르게 친해졌다.
나는 요리 따위 할 줄도 모르고 관심도 없던 무능력한 자취인이었다. 하루의 일이 끝나면 나는 익수에게 '오늘 문 엶? 밥 좀 해주삼'이라는 메시지를 보냈고, 익수는 '오늘 밥 없음', '라면 가능', '밥 좀 먹고 와라' 따위의 툴툴거리는 답장을 보냈다. '라면도 ㄱㅊㄱㅊ 7:30쯤 감' 그렇게 참프루에 가면 익수는 막 만든 차슈를 얹은 덮밥을 만들어주곤 했다. 익수가 만든 차슈덮밥은 짜지 않고 심심하니 아주 맛있었다. 가뜩이나 몇 좌석 없는 참프루에 손님들이 득실거릴 때면 나는 가장 안쪽 자리에 앉아 혼자 얌전히 밥을 먹고 맥주를 홀짝였다. 손님이 별로 없을 때면 나는 아이팟을 독차지하여 듣고 싶은 노래를 마음껏 틀었다. 어느 때는 손님들이 너무 많아서 다 받지 못할 때도 있었고, 어느 때는 손님이 나 혼자 뿐일 때도 있었다.
언젠가 참프루에 갔을 때 오십은 훌쩍 넘어 보이는 남자가 홀로 양주를 마시며 익수와 대화를 하고 있었다. 익수는 나에게 그 남자를 '을지로에 건물이 다섯 채 있는 분'이라고 소개해주었다. 실제 부동산 소유 여부는 확인할 길이 없었으나, 글라스 두 어잔을 마시고 옛다! 삼십만 원을 긁어라! 하며 쿨하게 카드를 내미는 모습을 보아하니 아주 허풍은 아니겠구나 생각했다.
그 남자는 늘 참프루에 취한 채로 왔다. 어디선가 3차까지 달린 후 꾸역꾸역 택시를 타고 혼자 참프루로 오곤 했다. 익수는 그 남자를 불편해했던 것 같다 - 아닐 수도 있다. 걸음을 못 가눌 정도로 취한 사람이 좁은 사업장에 들어오는 건 어찌 됐든 긴장되는 일일테니. 그 남자는 나에게 꾸준한 관심을 표현했다. 그는 내게 왜 사진을 하는지에 관해 반복적으로 물어봤다. 참프루에서 다시 마주할 때면 그는 같은 질문을 처음부터 다시 했다. 나는 그렇게 새벽바람에 휘발되어버릴 일회성 대화를 반복해나갔다. 그 남자는 나의 재즈 취향을 아주 좋아했다. 어린 여자아이가 My Funny Valentine과 같은 스탠더드 재즈의 가치를 어찌 알고 감상하느냐. 재즈에 별 관심이 없는 익수는 그 남자와 나의 대화를 구경했다.
그 남자는 나에게 번호를 알려주며 내 연락처에 자신의 이름을 '을지로 신사'라고 저장했다. 나는 그 남자의 본명을 모르기 때문에 시키는 대로 할 수밖에 없었다. '을지로 신사'는 얼큰히 취한 와중에 내 앞에서 근엄한 중년 남성의 이미지를 잃지 않으려 부단히 노력했다. 그는 나에게 사진이 찍히고 싶다고 이야기했다 - 그가 사진을 찍으러 오는 일은 결국 없었다. 그는 내가 마음에 든다며 내 이름으로 20만 원씩 결제했다. 20만 원이면 내가 좋아하는 글렌피딕을 넉넉히 마실 수 있는 돈이었다. 나는 내심 소소하게 술값으로 20만 원씩 긁지 말고 소유한 건물이나 한 채 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을지로 신사'는 참프루에 오면 나를 찾았다. 어느 더운 여름날, 외부 촬영을 하고 돌아오는 지하철 안에서 별안간 익수한테 전화가 오더니 '그분이 오셨는데 널 찾는다'며 언제쯤 올 수 있냐고 했다. 익수의 목소리에서는 조금의 미안함이 묻어 나왔다. 그래서 부리나케 참프루로 갔다. 그렇게 '을지로 신사'와 익수 그리고 나는 이젠 기억조차 나지 않는 대화를 종종 나누었다.
'을지로 신사'는 익수에게 자신이 소유한 건물에 있는 바에서 일하라고 했다. 참프루에서 악을 쓰고 일하는 것보다 훨씬 많이 벌 수 있을 거란 말도 덧붙였다. 익수는 정중하게 거절했다. 그 후로 참프루에서 나, 익수, '을지로 신사'가 함께 보는 일은 없었다.
7년간 망원동 골목의 한 자리를 지켜왔던 참프루는 2018년 9월 30일을 끝으로 영업을 종료했다. 건물주와의 지난한 싸움 끝에 익수는 참프루를 포기했다. 그가 자세히 이야기하지는 않았지만 참프루를 지키기 위한 일련의 과정 중 익수는 믿었던 사람들에게 너무나 큰 상처를 입었다고 했다. 그 상처는 그가 입은 금전적 손해보다 훨씬 아프다고 했다.
익수가 운영하던 참프루는 하루 만에 철거되었다. 하지만 그는 7년 간 쌓아온 참프루의 세월이 건물주에 의해 휘발되도록 놔두지 않았다. 익수는 청파동에 작은 공간을 구해 참프루랑 똑같이 세팅하여 회고전 - 이름을 시체전이라 지었다 - 을 열었다. 도시가스가 제공되지 않는 공간이었던 터라 그곳에서 익수는 화려한 요리를 대접하지는 못했지만 청파동까지 찾아온 소중한 사람들에게 간단한 간식과 술을 내주었다. 익수는 그곳에서 참프루의 시간 조각을 모아 한 편의 영화로 만들어 상영회를 열었다.
청파동 공간을 정리하고 익수는 인천으로 떠났다. 어느 세월동안 다양한 알바 자리를 전전하다가 훌쩍 세계여행을 떠났다. 그의 세계여행 소식은 익수가 아닌, (구) 참프루 근처의 카페 '마가렡' 사장님께 전해 들었다. 여행을 떠난 익수는 코로나라는 세계적 재앙을 맞이하여 올 초에 다시 한국으로 돌아왔다. 그렇게 몇 번 더 넘어진 익수는 생존 구력으로 몇 번이고 다시 일어나 또 다른 참프루를 준비하고 있다. 그는 이제 직접 양조도 한다.
1년 만에 연초를 다시 피우기 시작했다. 집에 뒹구는 라이터를 찾다가 참프루의 조각을 발견했다. 익수는 좌절의 시간 속에서 유머를 꽃피울 줄 아는 사람이었구나. 그의 생존은 이다지도 유쾌하구나. 참프루에서 스쳤던 많은 사람들을 떠올리다가 '을지로 신사'의 기억에 맞닿게 되었다. 익수는 망원동 참프루가 철거된 이후로 을지로 신사와 연락이 되지 않는다고 했다. 나의 연락처 안에도 '을지로 신사'는 어느새 지워져 있었다.
익수가 망원동 참프루를 지키기 위해 필사적으로 싸울 즈음 나는 속으로 괜히 '을지로 신사'를 원망했던 것 같다. 을지로에 건물이 다섯 채나 있는 사람이 왜 망원동의 코딱지만 한 공간을 잃지 않기 위해 죽기 직전까지 싸우는 가난에게 자비를 베풀지 않을까. 다분히 주관적인 관점으로 나는 그가 이기적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을지로 신사'라는 존재도 2018년 망원동 참프루와 함께 철거되어버렸다는 걸 이제는 안다. 괜찮다, 익수는 '을지로 신사'의 자비 없이도 여전히 잘 생존하고 있다.
생존도 구력이다. 몇 번을 넘어져도 다시 일어날 수 있는 익수의 유쾌한 생존이 나의 생존에 큰 위안으로 다가올 때가 있다. 이만 참프루 폐업 2주년을 기념하는 헌사를 마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