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의 집에 사는 것에 대하여
나는 지금 서울특별시 마포구에 위치한 '남의 집'에 살고 있다. 망원동, 성산동, 합정동에 위치한 모든 부동산에 발품을 팔아 정말 힘들게 찾은 세 번째 남의 집이다. 지어진 지 올해로 31년이 되는 이 상가주택은 나보다도 5살이 많다. 방 3개, 화장실 1개가 있는 이 집의 보증금은 3500, 월세는 110만 원이다. 상가주택이라 관리비는 3만 원으로 아주 저렴하다. 내가 입주하기 직전에 건물주 아들이 살던 집이라 인테리어는 꽤 세련됐다. 월세방에서 찾아보기 힘든 헤링본 나무 바닥이 깔려있고, 검은색 대리석 무늬의 아일랜드 식탁이 있다. 이십 대 중반의 나이에 혼자 힘으로 백이 넘어가는 월세를 감당할 위인은 되지 못해서 하우스메이트와 함께 살고 있다. 월세 날이 매월 15일이라 12일 즈음부터는 월세 걱정에 심장이 조금 크게 뛰고, 내 귀여운 통장 속에 월세를 낼만큼의 잔고가 확실히 들어있는지 여러 번 확인하게 된다. 같은 일을 반복적으로 하다 보면 능숙해지고 무뎌진다는데, 월세는 몇 년 동안 내도 능숙해지지긴 커녕 항상 고통스럽다. 그리고 내가 과연 월세만큼 이 집을 누렸는가 고민해보면 절대 그러지 못한 것 같아 좀 억울하기도 하다. 15일이 되면 창문 밖으로 지폐 꾸러미를 내던진다는 생각으로 월세를 송금하고, 집주인에게 '00월 월세 송금했습니다' 문자를 남기고, 월세값만큼 이 공간을 누려야겠다는 결심으로 아주 격렬하게 드러누워서 방바닥을 등으로 문대고 다닌다.
세 번째 남의 집에 들어오는 과정은 꽤 험난했다. 18년 말에 JTBC <요즘애들> 제작진에게 출연 제의가 왔는데, 그들은 나의 '작업실'에서 내가 유재석, 김신영, 하하 등의 거대한 연예인 패널들과 인터뷰를 진행하고 그들과 함께 사진 작업을 하는 모습을 담고 싶어 했다. 18년 말에 살던 두 번째 남의 집은 마포구 성산동에 위치한 7평 남짓의 복층 원룸이었고, 그곳에서 거주와 작업을 다 하고 있었기에 선뜻 방송국에 당시 (살면서) 작업하는 공간을 보여줄 수 없었다. 마침 독립된 작업공간에 대한 필요성을 절실히 느끼고 있었기 때문에 방송국 측에 새로운 작업공간을 구할 여유를 달라 양해를 구했고, 그들은 선뜻 촬영일을 미뤄주었다. 그렇게 미뤄진 촬영일은 19년 3월 셋째 주로 픽스되었고, 나에겐 두 달 정도 살면서 작업을 겸할 수 있는 공간을 찾을 시간이 생겼다.
이 동네를 떠야 할까? 당시 살던 두 번째 남의 집은 망원역 1번 출구에서 연남동 방향으로 향하는 도로변에 있었는데, 아주 역세권도 아닌 애매한 위치가 난 퍽 맘에 들었다. 집 앞에 초등학교와 고등학교가 있었고, 작지만 맛있는 밥집들이 도란도란 모여있었다. 새벽엔 새 울음소리로 잠에서 깨어나 아이들이 등교하는 소리로 하루를 시작하고, 해가 뉘엿뉘엿 저물어갈 쯤엔 멋진 하늘을 배경으로 하교하는 학생들의 들뜬 발걸음을 감상하는 낭만이 존재했다. 조금 걸어가면 북적거리는 전통시장이 있고, 노인과 아이들, 그리고 다채로운 젊음이 적절히 어우러진 멋진 동네라서 조금 더 살고 싶었다.
그래서 망원역 중심으로 망원동, 성산동, 서교동, 합정동에 있는 부동산을 전부 돌아다니며 사흘 동안 열일곱 개의 매물을 보았다. 전세를 구하기엔 주어진 시간도 너무 빠듯했고, 이 동네 전세 매물은 대부분 다 쓰러져가는 폐가들이라 월세 매물로만 찾아보았다. 원룸에서는 더 이상 살고 싶지 않아서 투룸, 쓰리룸 위주로 찾아다녔고, 지금 살고 있는 이 집을 찾게 되었다. 이 집은 원래 매물로 나온 집이 아니었으나, 이 집의 건물주가 부동산 주인과 아주 친한 사이였고 내가 마침 집을 구하러 발품을 팔던 날 공교롭게도 건물주의 아들이 판교의 한 아파트 청약에 당첨된 것이었다. '진짜 잘됐네 언니~'를 연신 내뱉는 들뜬 통화를 마친 부동산 주인이 마침 투룸, 쓰리룸 매물을 찾던 나에게 즉흥적으로 이 집을 보여주었다. '건물주가 아들 신혼부부를 들이기 위해 이런 고급진 인테리어를 다 해주었다. 다른 월세방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세련되고 깨끗한 공간이다. 이걸 보는 네가 정말 운이 좋은 거다.' 따위의 영업을 했으나 그렇게 귀에 잘 들어오지는 않았다. 그 집을 구경하는 내내 '건물주 아들은 엄마가 건물주라서 월세를 내지 않아도 되는 집에 사는데, 심지어 아파트 청약까지 당첨이 되었구나. 가택의 운은 왜 가진 자에게만 몰리는 걸까! 원통하다!'는 생각으로 가득 차있었다.
가택의 운을 부여받은 건물주 아들의 그 집이 찾던 매물 중 가장 조건과 가성비가 좋아서 입주를 빠르게 결정했고, 내가 살 세 번째 남의 집이 되었다. 망원역 2번 출구와 30초 거리인 초역세권 상가 주택의 4층이고, 전에 살던 집과는 도보 15분 거리였다. 집주인은 4월 초에 입주할 것을 이야기했으나 방송국 측이 더 이상 촬영일자를 미룰 수 없어서 사정사정하여 3월 중순에 입주를 마칠 수 있었다. 솔직히 이야기하자면 작업실에 방문할 다양한 손님들을 위해 엘리베이터가 있는 건물에 집을 구하고 싶었는데, 도저히 예산에 맞는 집을 찾을 수 없어 내린 차선의 선택이었다. 직장에 하루 연차를 내고 이사를 진행했다. 이삿날 이틀 후에 바로 방송 촬영을 했어야 해서 모든 것들이 아주 빠르게 갖춰져야만 했다.
대망의 이삿날에는 엄마도 하루 휴가를 쓰고 나를 도와주러 새벽부터 망원동에 와주었다. 내가 이전 집에서 짐을 정리해 용달 트럭에 싣고 운반할 동안 엄마는 중고 세탁기가 배송 오는 시간에 맞춰 기다리다가 세탁기 설치를 돕기로 했다. 정신없이 짐을 옮기고 있는데 엄마로부터 카톡이 하나 왔다. 세탁기 설치가 다 끝나서 볼일을 보러 자신의 동네로 돌아갔다는 카톡이었다. 얼굴도 못 보고 보낸 엄마에게 미안하고 고맙다는 말을 하기 위해 엄마에게 전화를 했고, 엄마는 약간 울상이 된 목소리로 이사 과정에서 서운한 일이 있었단 걸 말해주었다.
엘리베이터 없는 상가주택 4층에 세탁기를 옮기기 위해 배송기사님과 엄마가 세탁기의 각 모서리를 잡고 열심히 계단을 올라 화장실에 설치를 한 후, 배송기사님을 보내고 엄마는 바닥을 닦고 있었는데, 부동산 주인이 이사하는 걸 보기 위해 집에 방문을 했더랬다. 현관 신발장에서 집으로 들어오는 단층 모서리에 생활 흠집이 존재했고, 부동산 주인이 엄마에게 대번 손가락 질을 하며 이 바닥이 얼마짜리 바닥인데 어디 세탁기를 함부로 옮기며 감히 세입자 주제에 흠집을 낼 수 있느냐고 소리를 질렀다고 했다. 엄마는 이 흠집은 세탁기 들어오기 전부터 존재하던 흠집이었고, 세탁기는 화장실에 들여놓기 전까지 바닥에 내려놓지 않아서 바닥이 찍힐 리가 없다고 열심히 설명했지만 부동산 주인은 들은 체도 안 하고 '퇴거할 때 물어낼 줄 알아라' 따위의 협박을 늘어놓았다고 했다. 나는 이 이야기를 듣고 너무 화가 나서 이사를 마친 후 집주인에게 이사 완료 사실을 전달하며 부동산 주인이 엄마한테 범한 무례에 대해 이야기하였다. 집주인은 문자를 확인한 후 바로 전화를 해서 '어머니도 내 나이 또래일 텐데 아마 다 이해할 거라고, 좋게 좋게 넘어가라'라고 이야기했다. 한 마디의 사과도 없이 예민하게 굴지 말고 좋게 넘기란 그의 태도에 더 화가 났지만, 사과할 의지가 전혀 보이지 않는 집주인에게 고작 세입자인 내가 더 이상 할 수 있는 것은 없었다. 다음부터 집에 대해 이야기할 거리가 생기면 세입자인 나에게만 이야기하라는 으름장 아닌 으름장을 놓고 끊었다. 엄마가 당한 부당한 손가락질에 사과를 받아낼 수 없는 나의 위치가 서러웠다. 남의 집에 사는 것이 뭐길래 이렇게까지 비참해야 하나.
남의 집에 살기 위해서는 소소한 서러움을 자주 감내해야 한다. 내가 좋아하는 영화 포스터도 마음대로 벽에 붙일 수 없고, 못질이 필요한 커튼봉도 함부로 달 수 없다. 행여나 벽지가 조금이라도 찢어지거나 지워지지 않는 얼룩이 묻기라도 한다면 퇴거 시 집주인이 그 흠을 알아채지 못하도록 가릴 수 있을 묘안도 떠올려야 한다. 나는 내가 남의 집에 세 들어 산다는 사실을 조금이라도 잊기 위해 내가 좋아하는 영화 포스터와 내가 찍은 사진들을 잔뜩 붙여놓고 '나의 공간'으로 만드는 걸 꼭 숙제처럼 한다. 두 번째 남의 집에서 살 때는 무모하게 투명 박스테이프로 그것들을 붙여놓았었고, 퇴거할 때 무모했던 과거의 대가로 27만 원의 벽지 시공을 치러야만 했다. 남의 집살이에 도가 튼 친구 J는 나에게 꼭꼬핀이란 걸 알려주었고, 지금 살고 있는 남의 집에는 그 핀들을 이용해서 아주 안전하게 포스터들과 사진을 걸어놓았다. 계약이 만료되는 내년 3월에 퇴거할 때 그 어떤 흠도 잡히고 싶지 않아서 주기적으로 무균무때를 이용하여 벽지와 창틀을 열심히 닦는다. 이렇게 남의 집 살이에 점점 경험치를 쌓아가고 있다. 계약서에 명기된 2년이 지나면 또 이사를 해야 하니까 짐도 쉽게 늘리지 않는다. 내일 떠나도 이상하지 않게끔, 12만 원짜리 용달이사로 처리할 수 있을 만큼의 간결한 짐, 그리고 삶을 유지한다. 이사할 때 가장 골치 아픈 종이책도 사지 않고, 무겁고 비싼 가구도 들이지 않는다. 나는 이 집을 곧 떠날 거니까.
서울을 떠나고 싶은 이유 중 하나는 2년 주기로 떠돌아다니는 삶에 지칠 대로 지쳤기 때문이다. 전에 다니던 직장에서 만난 L 부장은 와이프와의 결혼생활에 설레는 낯섦을 불어넣고 싶어서 2년마다 집을 옮겨 다닌다고 했다. 남의 집에 사는 일을 설레는 낯섦이라 명명할 만큼 여유로운 사람이라니, 나에겐 '떠돌이 남의 집살이'란 일련의 기싸움과 비굴함으로 점철되어있는데 말이다. 나보다 훨씬 오랜 기간 남의 집살이를 한 엄마는 최근에 파주에 아주 큰 대출을 끼고 작은 아파트를 하나 마련했다. 쉰 살이 넘었는데도, '나의 집'이라 부를 수 있는 내 것 하나 없었다는 사실이 무척이나 서러웠다고. 내가 서울에 질려 파주에 들어간다 하니 엄마는 드디어 '독거 중년'의 삶을 탈출할 내년 3월을 꽤 설레는 마음으로 준비하는 듯하다. 요즘 엄마의 집에 자주 들러서 작은 방 하나를 어떻게 내 방으로 탈바꿈할 건지, 거실에 놓여있는 가구들을 어떻게 재배치하여 나의 작업실로 만들지 열심히 대화를 나눈다. 나의 집은 아니지만, 남의 집살이를 졸업한 엄마의 집에서 나의 집을 천천히 준비할 시간, 이것이 2021년에 나에게 불어올 낯선 설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