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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홍산 Aug 23. 2020

화순군, 마이 홈타운

나는 광주광역시의 어느 산부인과에서 태어나 초등학교 저학년 시절까지 전라남도 화순군 화순읍에서 자랐다. 당시 군인이던 아빠 때문에 부모님은 포천에서 근무하며 군인 아파트에 살고 있었고, 군부대 밀집 지역이라 어린아이를 키우기 마땅치 않은 터라 나는 화순에서 조부모님과 함께 살았다.


시간 날 때마다 내려와 화순에서 시간을 함께 보낸 나의 마덜.


집주소: 전라남도 화순군 화순읍 교리 공간아파트. 전화번호: 지역번호 061) 3**-92**. 20년 전의 기억이지만 여전히 생생하다. 집 주소는 포천에서 근무하는 엄마에게 편지를 주고받기 위해, 집 번호는 꼬깃꼬깃 쪽지에 적어 어린이집 친구들과 번호 교환을 하고 주말에 통화를 하기 위해 항상 외우고 다녀야 했다. 


화순은 꽤 시골이다. 사람들이 화순에 대해 아는 건 한때 잘 나가던 배드민턴 선수 이용대의 고향이라는 것 정도일 거다. 내가 다니던 어린이집은 어느 산의 중턱에 자리 잡고 있었다. 차멀미를 심하게 앓던 나는 등원할 때마다 등원 버스 안에서 늘 바지에 토를 잔뜩 했다. 어린이집에서 돌아오면 할아버지는 내 손을 잡고 뒷산으로 가 떨어진 지 얼마 안 된 촉촉한 은행잎과 단풍잎을 몇 개 주워다 책 사이에 꽂아 보관했다. 그렇게 빳빳이 잘 마른 예쁜 잎들을 종이에 살포시 붙여 코팅을 해서 책갈피를 직접 만들곤 했다. 


내가 살던 집 근처에는 만연사라는 절이 있었다. 만연사 올라가는 길목에 작은 저수지가 있었는데, 할머니가 낮에 일을 일찍 마치고 돌아오면 나를 데리고 그곳에 놀러 가곤 했다. 하루는 어린이집에서 우유갑으로 배를 만들어왔다. 할머니는 배를 저수지에 띄워 보내주자고 했다. 나는 할머니에게 저수지에 띄운 배는 어디로 가냐고 물었고, 할머니는 넓은 바다로 항해할 거라 이야기해주었다. 여섯 살의 나는 저수지가 큰 바다로 이어지고 우유갑과 수수깡으로 만든 작은 배가 영영 망가지지 않고 드넓은 바다를 항해하리라 믿었다. 그래서 배를 띄운 날 밤 혼자 울었다. 그 배를 다시는 보지 못할 생각이 그렇게도 서러웠었나 보다. 


그게 만연사 앞 저수지에 대한 마지막 기억이다. 만연사 앞 저수지가 있던 장소가 재개발구역으로 지정되었고 저수지는 순식간에 메워졌기 때문이다. 만연사는 여전히 그곳에 있지만 만연사 앞 저수지는 그곳을 기억하는 몇 안 되는 사람들의 기억 속에만 남아있다. 만연사 앞 저수지가 흙으로 메워질 즈음엔 내가 어렸을 적 띄운 배는 바다로 나가 항해하지 못했다는 사실을 이미 깨달았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할머니와 함께 띄워 보냈던 우유갑과 수수깡으로 조악하게 만든 배를 떠올렸다. 


8살에 나는 화순을 떠났다. 할머니는 내가 더 오래오래 화순에 머무르길 원했지만, 나는 엄마가 제안한 도시의 삶에 더 끌렸다. 비 오는 날 흙을 뚫고 나오는 지렁이와 아파트 벽면에 집을 짓고 사는 거미들과 함께 노는 시간, 화단에 핀 봉선화 꽃과 잎을 따 곱게 빻아 손톱에 물들이던 시간, 만연산을 거닐며 예쁜 은행잎과 단풍잎을 모으던 시간을 뒤로하고 나는 도시의 삶을 시작했다. 


도시에서 처음 만난 아이들은 내가 지렁이를 맨 손으로 덥석 만지고 거미줄에 매달린 거미를 반가워하는 모습을 혐오했다. 도시에는 옹기종기 모여 앉아 나에게 갓 쪄낸 절편을 나눠주는 할머니들도 없었다. 맛있는 무장아찌를 팔던 화순 5일장도, 촉촉이 젖은 은행잎과 단풍잎도, 그것들을 책 사이에 에 꽂아 예쁜 책갈피로 재탄생시키는 기다림의 낭만도 없었다. 그래서 몇 달 동안 화순에 있는 할머니한테 전화를 걸어 엉엉 울며 돌아가고 싶다고 했다. 할머니는 언제든 돌아오라 했지만 돌아가지 않았다. 그렇게 나는 전라남도 화순군에서 인천광역시로, 인천광역시에서 경기도 고양시로 옮기며 도시의 삶에 적응해나갔다. 


경기도 고양시에서 서울특별시로 집을 옮기고 도시의 삶에 중독되며 인프라 없는 삶을 더 이상 견딜 수 없는 몸이 되었을 때, 비로소 나는 만연사 앞 저수지를 다시 떠올렸다. 나는 여전히 만연사 앞 저수지에 흘려보낸 그 배가 분홍 수수깡으로 만들어진 돛대 위에 닻을 펴고 이 지구의 어딘가에서 여유롭게 떠다니는 상상을 한다. 이번 가을엔 엄마랑 파주의 심학산을 거닐며 예쁜 은행잎과 단풍잎을 주워 책 사이에 끼워놔야겠다. 만연사 앞 저수지의 자취를 따라 병든 도시를 떠나 새로운 삶을 차근차근 구성하는 일을 시작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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