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독한 서울병에 걸리고 말았다.
나는 절대 걸리지 않으리라 확신했다. 대한민국 52%의 인구가 사는 도시, 불이 꺼지지 않는 도시, 노동권을 지키지 못하는 노동자들이 야경을 밝히는 도시 따위에 함몰될 정도로 빈약한 자아를 가지고 성장했다고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마포구에서 대학을 처음 다닐 때까지만 하더라도 서울은 참 별게 아니었다. 인터넷에 유행하는 맛집이 좀 있고, 백종원의 거대 프랜차이즈와 간판 없는 1인 술집이 공존하는 동네, 화장실과 주방이 분리되지 않는 집에 살기 위해 월 60만 원을 꼬박꼬박 지출해야 하는 동네이구나, 생각했다.
하지만 20대 초반의 나는 노는 걸 너무 좋아했다. 새벽 네시가 되도록 꺼지지 않는 신촌 거리를 얼큰히 취한 채 거닐면 마치 새벽 구름 위에 올라탄 듯 낭만적이라 생각했다. 하수구 붙잡고 토할 때까지 술을 마셔대던 날들이 나의 젊음을 증명하는 것 같았다.
서울의 밤거리에 중독될 무렵 나는 경기도를 떠나 서울로 독립했다. 온갖 신분증에 경기도민이 아닌 서울시민으로 찍히는 사실이 너무 설렜다. 그래서 이사하자마자 바로 주민센터에 달려가 전입신고와 동시에 주민등록증을 새로 발급받았고, 또 경찰서로 달려가 분실하지도 않은 운전면허증을 분실 사유로 재발급을 받았다.
서울살이는 판타스틱, 어메이징, 모든 수식어를 붙여도 그보다 더 벅차올랐다. 광적으로 좋아하는 커피를 24시간 마실 수 있는 수많은 카페들이 늘어서있었다. 새벽 세시까지 술을 먹어도 택시비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됐다. 나는 마포구민이니까, 대략 마포구 어딘가에서 언제까지 얼마나 먹든 6천 원 이내로 귀가할 수 있었다. 너무 멋진 삶이라 생각했다. 서울 살이 끝내준다 - 드디어 삶에 비어있던 무언가를 제대로 누린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무언가가 무엇인지는 여전히 정확한 언어로 묘사가 불가능하다.
서울살이에 슬슬 적응되던 차, 대학을 졸업하고는 대학 앞 동네를 떠났다. 너무 시끄러웠기 때문이다. 새벽 두시가 되도록 떠나갈 듯 과 FM을 외치는 스무 살과 스물한 살들, 아침 공기를 가득 메우는 음식물 쓰레기와 토사물 냄새, 발에 채는 취한 젊음들. 그래서 망원동으로 거취를 옮겼다. 시장이 있고, 사람 사는 냄새가 나고, 거대 프랜차이즈 상점이 드물어서 좋았다. 예술가들의 동네라고도 하더라 - 실은 이 점이 별로 특별하진 않았다. 예술가들의 동네라니, 으.
망원동에 산 지 1년이 좀 넘고 취직을 하게 되었다. 회사도 성수동에서 선정릉으로, 선정릉에서 도산공원으로 옮겼다. 매일 출근하기 위해 수많은 한강다리를 건넜고, 출근하는 검은 곰팡이들 (정수리들이 빽빽하게 모여있는 것이 꼭 곰팡이를 닮았다) 사이에 끼어 정신을 놓고 쓸려다녔다. 성수에서는 퇴근 후 매일을 뚝섬 근처를 누비며 취해 살았고, 선정릉에서는 지독한 괴롭힘을 당해 혼자 술독에 빠졌다. 당산역에서 9호선을 타기 위해 기다리는 순간부터 회사 출근 도장을 찍는 순간까지 울음을 머금고 출근한 날도 많았다. 그렇게 강북과 강남을 누비며 온갖 희노애락을 익혔고, 어느덧 그러한 서울살이가 삶의 기본값이 되었다.
회사를 도산공원으로 옮기고 나서는 충격적인 사실을 깨달았다. 그 동네 - 이효리의 과거 집, 이명박의 현재 집, 논현동 광고골목, 그곳과 이어지는 가로수길 - 에는 처첩제도가 여즉 존재한다는 것, 출근시간에 자동차가 인도 위로 씽씽 달린다는 것. 외제차권, 보편적 차권, 견권과 묘권 한참 아래에 인권이 존재한다는 것 - 그마저도 너무 희미해 존재하지 않는다고 봐도 무방하다. 아무리 가난해도 벤츠는 몰아야하는 동네, 압구정 현대아파트의 옛 명성을 되찾기 위해 그 어떤 추한 말도 서슴지 않고 함부로 내뱉을 수 있는 사람들이 살고 있는 동네, 그럼에도 많은 사람들이 갈망하는 동네.
마포구가 서울의 전부였던 내가 마주한 강남구 도산공원의 민낯은...추했다. 노인도, 아이도, 장애인도 없는 '깨끗한', '세련된' 동네는 갈수록 그 악취가 심해졌다. 강남구 태생의 자부심은 여느 조선시대 족보보다도 드셌다. 이걸 묘사할 수 있는 언어는 '역겹다' 이외에 그다지 떠오르지 않는다.
하지만 개인은 그가 소속된 준거집단을 절대 거스를 수 없는 법, 그 악취는 어느샌가 나에게 스며 나도 '그들처럼' 변해가고 있었다. 어느 저녁 퇴근길, 압구정 현대백화점 옆 좁은 골목을 걸어가고 있었다. 뒤에서 어떤 차가 클락션을 빵 하고 울렸다. 뒤를 돌아봤다. 험머였다. 거대한 바퀴가 나를 누를듯이 노려보고 있었다. 얌전히 비켜드렸다. 험머는 워낙 차체가 커서 그 좁디 좁은 골목 벽에 내 몸을 온전히 바싹 붙여야만 그 길을 지나갈 수 있었다. 또 다른 저녁 퇴근길, 압구정 로데오 골목을 걸어가고 있었다. 뒤에서 어떤 차가 클락션을 짜증나게 울렸다. 뒤를 돌아봤다. K7이었다.
'감히 기아차가 나한테 클락션을 울려?'
비켜주지 않았다. K7 앞을 굳건히 지키며 무엄하도다, 감히 국산차 따위가 압구정에서 클락션을 울리다니, 라고 생각했다.
그 순간 깨달았다. 나는 지독한 서울병에 걸려있다는 것을.
그리고 가장 처음 한 결심은, 서울과의 이혼 - 특히, 도산공원을 어떻게든 떠나야겠다고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