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상주의부터 레디메이드 예술까지.
그다지 춥지 않았던 1월 5일 오후 네시 반, 국립현대미술관(MMCA) 입구에서 현채와 만나기로 했다. 하지만 현채의 습관적인 늦장으로 약속시간은 곧 다섯 시 반이 되었다. 다섯 시 2분 전 도착한 MMCA는 <2018 올해의 작가상> 전시 때와는 다르게 많은 사람들로 북적였다. 손을 꼭 잡고 동네 산책 나오신 노부부, 무엇이 그리도 서러운지 로비에서 힘차게 우는 아이들, 그리고 당황한 눈빛으로 그 아이들을 어르고 달래는 젊은 부부들로 회색의 적막한 공간은 평소와 다르게 활기를 띠었다. MMCA가 큐레이팅 하는 전시들은 대중성보다는 작가의 개성과 색채, 그리고 작품의 시의성과 이가 담고 있는 사회적, 예술적 가치에 무게를 둔다. 포스트 모더니즘 예술을 대표하는 뒤샹의 변기통, 아니 <샘>이 서울에 전시된다는 소식은 미술에 특별한 관심이 없던 사람들의 눈길까지 사로잡았다.
MMCA가 큐레이팅한 뒤샹展은 총 4개의 챕터로 구성되어 있다. 첫 두 챕터는 뒤샹의 모더니즘 미술 교육을 받던 시절의 초기 작품에서 입체주의 예술가로서 성장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세 번째 챕터에서는 뒤샹에게 오늘날의 명예를 안겨준 다다이즘 예술을 다루고, 마지막 챕터에서는 <L.H.O.O.Q>와 같은 출판물의 전시와 더불어 뒤샹의 사진들을 통해 그의 생애를 다룬다.
뒤샹은 인체의 해체를 통하여 상상 속 궁극의 에로티시즘을 구현했다. <The Bride Stripped Bare by Her Bachelors, Even (큰 유리), 1915 - 1923>과 같은 다다이즘 작품으로 이름을 날린 포스트 모던 예술가 뒤샹의 배경은 의외로 견고한 모더니즘과 그 당시의 예술 교육에 적을 두고 있다. 따라서 그의 초기 회화는 인상주의 색채가 강하다. 하지만 그는 가까운 수학자들의 영향을 받아 눈에 보이고 손에 잡히는 실체를 기하학적으로 해석하는 실험을 하며 그의 작품은 입체주의적인 결을 갖기 시작했다. 그는 빠른 속도로 입체주의적 화풍을 발전시켜나갔다.
뒤샹의 주된 관심사는 체스와 여성의 누드였다. 그는 여성의 누드에 두드러지는 곡선을 해체함으로써 내재된 역동적인 욕구를 이끌어내고자 했다. 뒤샹이 그려낸 여성의 누드에서 한 가지 흥미로운 지점을 발견했는데, 몸의 형태는 크게 해체되었어도 얼굴의 형태, 즉 표정은 어지러운 직선들 사이에서도 생생히 살아있다는 것이었다. 아마 뒤샹의 욕망 속 살아 숨쉬는 여성의 형태 중 가장 가치를 크게 둔 곳이지 않을까, 감히 추측해본다. 그는 또한 움직임에 대한 정지 이미지를 캔버스 위에 구현하고자 했다. 그는 <계단을 내려오는 누드, 1912>를 제작하고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다.
“I wanted to create a static image of movement: movement is an abstraction, a deduction articulated within the painting, without our knowing if a real person is or isn’t descending an equally real staircase.”
나는 움직임의 정지 이미지를 창조하고자 했다: 움직임은 추상이다 - 실제 사람이 실제 계단을 실제로 내려오는가에 대하여 알지 못한 채 작품에 표현된 추론이다.
MMCA는 뒤샹의 인상파 및 초기 입체파적인 작품에서 <계단을 내려오는 누드>로 발전하는 과정에 위의 인용구를 배치함으로써 뒤샹 작품세계의 서사를 섬세하게 구축하였다.
두 번째 챕터에서 세 번째 챕터로 넘어가는 공간에는 <The Bride Stripped Bare by Her Bachelors, Even (큰 유리)>에 관한 영상을 설치하여 그의 다다이즘 예술관에 관한 이야기를 풀어냈다. 그는 상상 속 에로틱한 여성의 모습을 직선으로 구성된 딱딱한 평면의 메탈을 이용하여 묘사하였다. 뒤샹은 인체를 넘어 정물의 형태와 의미를 해체하며 그의 작품관을 '레디메이드 예술(readymade art)'로 발전시켰다.
'레디메이드 예술'은 뒤샹이 고안해낸 장르로, 기성품의 원래 기능을 제거하고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는 행위를 하나의 예술로 정의한다. '레디메이드 readymade'라는 단어는 '수제 handmade'와 달리 공장에서 만들어진 기성품을 뜻하는 단어로 19세기에 처음 등장했다. 뒤샹은 '레디메이드'라는 용어를 재정의하는 것으로 레디메이드 예술의 길을 개척했다. 레디메이드 예술에는 세 가지 중요한 지점이 있다. 첫째, 예술품으로서 기능할 오브제를 선택하는 행위 자체이다. 둘째, 오브제가 원래 지닌 '유용한' 기능을 삭제함으로써 예술이 된다. 셋째, 오브제에 새로운 이름을 부여하고 이를 전시하는 행위는 오브제에게 새로운 의미를 부여한다. (테이트 미술관 tate.org.uk)
<The Bride Stripped Bare by Her Bachelors, Even (큰 유리), 1915-1923>에 관한 영상을 지나 한 층 내려가면 세 번째 챕터가 시작된다. 조도가 다소 낮은 커다란 큐브 공간 안에는 <The Foundtain(샘)>과 <Bottlerack>의 레플리카가 중심을 잡고 있으며 이를 감싸는 벽면에는 뒤샹의 다다이즘 미술에 관한 다양한 기록이 전시되어있다.
네 번째 챕터는 어두운 공간을 간간히 비추는 간접조명 아래 그의 생애를 찍은 사진들과 관련된 다양한 업적과 기록들, 그리고 그의 출판물 속 레디메이드 예술 작품들로 구성되어있다.
뒤샹은 모나리자에게 섹스어필이 부족하다고 느꼈다. 그는 기존의 모나리자 작품 위 콧수염으로 그리고 밑에 L. H.O.O.Q라는 글자를 적었다. 프랑스어로 L.H.O.O.Q를 발음하면 "Elle a chaud au cul" (그녀의 엉덩이는 섹시하다)와 비슷하게 들리는데, 뒤샹의 언어유희를 엿볼 수 있는 작품이다.
네 번째 챕터를 다 본 후 전시장에서 나가고 싶었으나 따로 출구 안내를 찾을 수 없었다. 주변을 관찰하니 사람들이 거대한 커튼을 걷어내고 그 밖으로 나가는 모습을 볼 수 있었고, 나는 다소 불친절하고 허술한 전시 마무리에 아쉬움을 느꼈다.
많은 사람들이 포스트모더니즘 예술을 '별 것 아닌 것'으로 평가절하한다. 하지만 포스트모더니즘 예술이 기존의 의미중심성을 뒤엎는 행위인 만큼, 그 작품들 뒤에는 의미를 구축하고 해체하는 과정까지의 고민과 그 고민에서 우러나온 감각이 존재한다. 네 개의 분리된 공간 구성을 통하여 뒤샹의 모더니즘 경향이 강한 초기 작품부터 입체주의로 발전하는 모습, 그리고 오늘의 뒤샹을 만들어준 레디메이드 예술과 그 기록을 적절히 큐레이팅 해놓은 MMCA에 높은 점수를 주지만, 다소 산만했던 네 번째 챕터의 큐레이션과 감각적인 입구와 달리 허술하고 불친절한 출구에는 큰 아쉬움이 남는다.
MMCA를 나서니 겨울 해는 이미 그 모습을 감춘 뒤였다. 현채와 나는 저녁을 먹기 위하여 을지면옥을 갈지 익선동 먹거리 골목을 갈지 고민하다 따뜻한 탕이 먹고 싶다는 결론에 다다른 우리는 익선동 쪽으로 향했다. 예상치 못한 입구로 들어선 익선동의 좁은 골목에는 다양한 종류의 맛있는 냄새들이 뒤섞여 식욕을 자극했다. 우리는 어느 닭볶음탕 집에 들어가 뒤샹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며 매운 닭볶음탕에 간단한 음주를 곁들였다.
마르셀 뒤샹과 함께한 네 시간 |
오후 네시 반부터 다섯 시: 집에서 출발하여 국립현대미술관 도착하다
다섯 시부터 여섯 시: 국립현대미술관에서 마르셀 뒤샹전 감상하다
그 여섯 시부터 일곱 시 반: 익선동 닭볶음탕 집에서 맛있는 식사와 간단한 음주를 즐기다
일곱 시 반에서 여덟 시: 익선동에서 집으로 돌아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