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변에서 유행처럼 법정 스님의 <무소유>를 읽던 시기가 있었다. 유행이나 입소문을 잘 따르지 않는 편이지만 왠지 모를 끌림과 책 읽기에서만큼은 욕심이 많은지라 질세라 따라 읽었다. 치기 어린 마음에 무소유를 소유하고 싶었던 것인지도.
두껍고 어려운 서양 고전 번역서(번역이 엉망이어서 어렵게 느껴지는 책이 참 많다)를 주로 읽던 내게 작고 얇은, 게다가 술술 읽히는 이 책은 그야말로 신선한 충격이었다. 얇은데 묵직하고, 가벼운데 깊었다.
내 안의 묵직한 무언가가 대기층으로 증발되는 듯한 그때의 기분은 일종의 자유감이었다. 무소유란 그런 존재의 가벼워짐이 아닐까 어렴풋이 깨달은 순간이기도 하다. 문화와 사상이 담긴 우리말과 글의 참 아름다움을 체험한 것은 무엇보다 큰 소득이다.
그때부터인듯하다. 불교가 내게 종교라기보다는 삶의 의미와 존재의 방식을 생각하게 해주는 생활의 철학으로 다가온 것이. 법정 스님의 주례사는 결혼 생활의 바이블이었고, 법륜 스님의 <엄마 수업>은 육아의 바이블이었다. 또 삶의 어려운 시기를 통과할 때마다 불교 경전의 말씀들이 나를 지탱해 주고 한걸음 내디딜 힘을 주곤 했다. 가장 최근에는 비욘 나티코 린데블라드의 <내가 틀릴 수도 있습니다>와 법륜 스님의 <행복 수업>이 그런 역할을 해주었다.
세상을 제대로 살아보지도 않은 채 사는 건 그저 고되고, 존재는 무겁기만 하다고 단정 지었던 내게 깨우침을 준 법정 스님의 무소유. 그리고 지금 다시 법정 스님의 말씀을 만났다. 존재의 이유를 넘어 존재의 풍성함, 진정한 내 삶의 웰빙을 생각할 때라는 삶이 보내는 메시지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