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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The Emilia Moment Jun 14. 2024

권벽과 카프카와 이정귀와 나 - 이정귀의 <습재집서>

#오늘하루영감문장

 

이정귀는 습재 권벽 (權擘, 1520 - 1593)의 저서 <습재집(習齋集)> 서문에서 권벽의 삶과 글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시에 능한 것이 그로 하여금 궁하게 만든 것이 아니라 궁하다 보니 절로 능히 몰두하게 되고 몰두하다 보니 절로 훌륭하게 된 것이다."
- 이정귀, <습재집서(習齋集序)> 중에서


권벽이 마주했던 궁한 환경, 즉 삶의 시련과 고난은 권벽을 시에 더욱 몰입하게 만들었고, 그를 훌륭한 문장가로 키워냈다.


"오직 한 시대와 만나지 못한지라 능히 시에 온통 집중해서 후세에 전한 것이다. 이 어찌 하늘이 공에게 문장의 자루를 맡겨서 그로 하여금 오로지 몰두하게 한 것이 아니겠는가? 이렇게 보면 공의 불우는 또한 하늘의 뜻이다. 잠깐 영화를 누려 빛나다가 스러져 아무 전함이 없는 자들과 견줘 본다면 어떠하겠는가?"
- 이정귀, <습재집서(習齋集序)> 중에서


이것이 바로 이정귀가 발견한 권벽이 겪은 시련과 고난의 참 의미가 아니었을지 생각한다.






2년 전, 이정귀의 글을 통해 권벽의 삶을 읽으며 난 자연스레 카프카를 떠올렸다. 권벽과 카프카, 이 둘의 삶이 꽤나 닮아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현실에서 도망치지 않았다. 자신의 몫을 살아내며 동시에 글쓰기에 절박하게 매달렸다. 글쓰기는 그들 삶의 숨 쉴 구멍이었으리라.




1년 전, 카프카가 글을 쓰기 위해 머물던 프라하의 황금소로 22번지를 방문했다. 대체 어떤 심정으로 화장실도 없는, 성인이 혼자 서 있기도 빠듯한 이 작고 열악한 공간에서 글을 썼을까를 생각하며 아련한 마음으로 조심스레 발을 들여놓았다.

그리나 애잔함은 이내 안심으로 바뀌었다. 그곳은 그만의 작고 아름다운 도피처이자 안식처였음을 알게 됐다. 그곳에서 그는 글쓰기에 몰두하며 세상 그 어떤 곳에서보다 크게 숨 쉬며 살아있는 자신을 느끼고, 누렸으리라.

"나는 문학에 관심이 있는 것이 아니라 문학으로 만들어져 있으며, 다른 그 무엇도 아니고 다른 그 무엇도 될 수 없다."
- 프란츠 카프카, 1913년 8월, 연인 펠리체 바우어에게 보낸 편지에서


지난 2년의 시간이 내게 그러했다. 어떻게 그리도 빠르고 깊게 글쓰기에 몰입할 수 있었는가를 곰곰이 생각하면 새벽 글쓰기 시간과 나만의 작은 글쓰기 공간이 내게 그런 숨 쉴 구멍이 되어주었다.

 

문장은 하나의 재주지만 반드시 오로지 몰두한 뒤라야 훌륭해진다... 훌륭한 시는 온전한 몰두 속에 있다.
- 이정귀, <습재집서(習齋集序)> 중에서


그사이 내 글이 조금이라도 나아진 구석이 있다면 내가 처했던 궁한 환경 덕분이었고, 그 덕에 글쓰기에 몰입한 덕분이리라. 그렇다고 다시 돌아가고 싶다거나 반복하고 싶다는 뜻은 아니나 무의미한 시련과 고통은 결코 없음을 다시금 깨닫는다.

이정귀에겐 권벽이, 나에겐 카프카가 그렇게 서로의 삶에서 의미를 발견하고 또 부여하며 서로가 연결되고 있음을 느낀다.


#권벽 #이정귀 #카프카 #마흔의문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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