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생애 첫 낭독극은 스무 해도 전 보았던 파우스트였다. 마치 합창단처럼 대사집을 들고 서서 목소리와 표정만으로 연기를 하는 무대 위 배우들은 연극과는 또 다른 깊은 몰입의 시간을 선사했다. 서구에선 낭독회와 낭독극이 오랜 역사를 가졌다지만, 당시의 내겐 문화 충격이 아닐 수 없었다.
그 뒤론 낭독극을 볼 기회가 없었는데, 최근 낭독에 부쩍 관심이 많아지던 차 우연히 집 근처 문화 공간에서 낭독극을 진행한다는 소식에 반가운 마음에 다녀왔다.
그리하여 내 생애 두 번째 낭독극으로 기록될, 극단 베미드바르의 '여자, 또 엄마'. 현재, 그리고 가까운 미래에 이뤄질 사회적 문제 속에서의 여자로서의 삶, 엄마로서의 삶을 다루는 내용이다.
'여자, 또 엄마'는 1시간여의 짧은 러닝 타임에도 창작에 대한 자극과 삶과 죽음에 대한 묵직한 생각거리를 던져줬다.
그중 가장 인상 깊었던 장면은 암에 걸린 엄마가 항암 치료가 아닌 '안락사'를 선택하고 딸에게 자신의 결정을 쏘쿨하게 전하는 장면. 말하는 엄마도, 듣는 딸도, 잠시 오가는 아빠도 너무도 쿨해서 서늘했다. 이내 그 서늘함이 쓸쓸함이라는 것을, 깊고 외로운 슬픔이라는 것을 느꼈는데 맥락을 본다면 쿨하지 않았을 엄마의 선택이 보였기 때문. 그녀의 사무치는 외로움과 고독이 보였다. 그렇다면 그녀의 선택은 과연 자의적 선택이 맞을까?
안락사... 이래저래 생각이 많아졌다. 가장 먼저 <내가 틀릴 수도 있습니다>의 저자 비욘 나티코 자신과 그의 아버지의 안락사 선택이 떠올랐고, 다음으로는 영화 <미 비포 유>가 떠올랐고 마지막으로 <삼체> 속 안락사 선택이 떠올랐다.
만일 내게도 그런 선택의 순간이 온다면, 내 죽음의 시간과 장소와 방법을 선택할 수 있다면, 난 과연 어떤 모습으로 가족과 세상과 작별의 인사를 하게 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