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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The Emilia Moment Sep 17. 2024

LACMA의 추억 III

피카소의 변신은 무죄


순간의 감상과 영감을 즉각적으로 글로 풀어낼 때도 있지만, 대개 추상을 구체화할 적절한 단어를 찾고 글로 전환하는 데에는 꽤 많은 시간과 정성, 그리고 몰입의 에너지가 필요하다.

그렇게 적당한 때를 찾아 차일피일 미루다 보면 시기를 영영 놓치기 십상이다. 뒤늦게라도 올리면 되지 않는가 반문할 수 있겠으나 순간의 생각, 감정, 영감은 휘발성이 강하다. 글을 쓰고자 했던 순간의 목적성마저 함께 휘발되어 버리곤 한다.


그렇게 잊고 지나칠 뻔했던 피카소를 다시 상기한 건 이른 새벽 읽은 책 속 문장 덕분이다.


'피카소는 계속 변신했습니다'


이 한 문장이 내 안에 남아 있던 순간의 감상과 영감의 한 조각을 끌어올려 주었고 덕분에 이렇게 '라크마의 추억 3탄'을 남겨본다.



뜨거웠던 지난여름(날씨는 여전히 한여름 무더위지만), 뉴욕 모마, LA 게티와 라크마에서 인상적이었던 것 중 하나는 피카소와 마티스다.


한자리에서 그렇게나 많은 피카소와 마티스의 작품을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인데 라크마에선 더 이상 '우와 피카소', '우와 마티스'도 나오지 않더라는. 미국 사람들은 피카소와 마티스를 유난히 좋아하나?라는 생각마저 하게 되고.


그럼에도 라크마의 피카소 전시실이 각별히 인상적이었던 건 그의 대표작뿐만 아니라 그의 작품이라 믿기지 않는 초기 작품부터 그야말로 작품 스타일의 변화상을 한눈에 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피카소는 계속 변신했습니다.
새로운 기법을 발표할 적마다
연인이 바뀌었습니다.
자신뿐 아니라, 온 세계 사람을 감동의 도가니로 몰아넣었습니다.

- 이시형, <행복도 배워야 합니다> 중에서

책 속 문장처럼 피카소는 화풍과 함께 작품 속 연인도 바뀌었다. 작품세계의 변화, 연인의 변화. 무엇이 선이고 무엇이 후인지는 정확히 알지 못하나 알이 먼저냐 닭이 먼저냐의 문제가 아닐지.



사람은 변한다. 생각만이 아니라 세상과 사람을 바라보는 눈도 변한다. 영화 속에선 '어떻게 사랑이 변하니'라고 했지만 사람이 변하면 사랑도 변한다. 변화는 때로는 서서히 때로는 불현듯 한순간에 찾아들기도 하는데 그때의 변화는 그야말로 환골탈태, 변신이다.

사람들은 시종일관 같은 모습을 유지하는 사람을 한결같다고 칭찬하지만 나는 왠지 그 한결같음이 노력의 부재로 느껴져 영 탐탁지 않을 때가 있다. 노력하고 성장하는 인간이 어떻게 한평생 같은 생각과 마음일 수 있을까? (물론 그런 사람도 있다. 많다.)



그러나 대개의 우리는 시기별 나이별 변화의 순간을 맞게 되고, 그런 자신을 솔직하게 인정하고 마땅히 변화해야 한다. 그러한 변화와 성장을 변심이라던가 변절이라고 평가절하하기도 하지만 나는 여전히 굳은 신념 또한 바뀔 수 있으며 또 바뀌는 것이 마땅하다 생각한다.


시대적 변화 속에서도 초지일관 같은 생각과 말과 행동을 유지하는 사람이 되려 무섭고 겁난다. 그야말로 '고집+불통'의 총체가 아니겠나. 그런 사람이 우직하고 게다가 리더의 위치에 있다면 더욱 경계할 일이다.

그렇기에 피카소의 거듭된 변신은 정직하고 용감하고 멋지다. 여전히 그의 작품에 이렇다 할 매력을 느끼지는 않지만 그의 끝없는 변신만큼은 존경스럽다.



가만 생각해 보니 그건 내가 괴테를 좋아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질풍노도 시대부터 고전주의, 그리고 낭만주의까지. 괴테의 작품 세계는 그의 긴 생애만큼이나 다채롭게 변화했다. 그의 작품들은 시대의 변화와 함께, 그리고 그 자신의 성장과 사상의 변화와 함께 끊임없이 진화해 왔다.

괴테는 '인간은 노력하는 한 방황한다'라고 말했는데, 변화와 함께 끊임없이 진화하고 변신한 그의 이력을 본다면 그에게 방황이란 멈춤과 성장 사이, 끝없는 내외부적 저항을 이겨내고 마침내 변화의 계단에 올라서 변신을 선택하는 노력의 여정이지 않을까 생각한다.



늘 그렇듯 이런 감상의 끝은 나 자신에게로 향하곤 하는데. 요즘 내 심리적 방황의 원인이 여기에 있었음을 깨닫는다.

아. 나는 또다시 변신하고 싶은 것이로구나. 어쩌면 나는 노력하는 이의 방황과 불안정을 남모르게 추앙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이거야말로 역마살인가?

노력을 멈추는 순간, 방황의 끝이 아닌 근원적 불안과 참을 수없는 삶의 따분함이 동시에 찾아든다. 설렘이 사라진 안정된 삶은 천국일까 지옥일까. 내 안의 나는 이미 그 답을 알고 있을 텐데 무엇을 망설이는 것인가.


내가 진정 원하는 건 무엇이고, 그래서 나는 무엇이 되려는가? 라크마의 추억이 새롭게 던져준 오늘의 화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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