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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kasory Apr 12. 2020

쉬운 판단.

작년 9월에 새로 온 교장선생님은 부임한지 한 달이 채 안 됐을 때 학년별로 티타임을 가졌으면 좋겠다고 했다. 우리 학년 차례가 오자 선생님들 바쁠텐데 20분만 시간내 주시라길래 '그래. 20분 정도야 뭐.'란 마음으로 교장실로 향했다. 그는 활짝 웃으며 우리를 맞이했고 차는 뭘로 하겠냐며 미리 끓여놓은 물을 분주히 종이컵에 나눠 담았다.



'어른으로서 좋은 인상 심는 방법'이란 설명서가 있기라도 한걸까. "제 1조. 차를 손수 타주며 권위의식 없는 어른임을 보여주고 환대의 마음을 적극적으로 표현한다." 행동에 의도가 있든 없든 불편하긴 마찬가지였던 나와 선생님들은 각자 알아서 타먹겠다며 그의 친절을 적당히 마무리지었고 어색한 원형 탁자에 앉아 침묵 속에 홀짝홀짝 차만 들이켰다.



"이렇게 만나서 반갑습니다. 부임하고 제대로 인사도 못하고 지나간 게 아쉬워 뵙자고 했습니다." 교장선생님은 첫인사와 함께 수첩을 펼치더니 빼곡히 적혀있는 글자들을 손가락으로 짚으며 우리의 이름을 불렀다.



"우리 ○○선생님 결혼은 하셨고? ○○교대 나오셨는데 어떻게 여기서 교사생활을 하고 있어요?" 그때 난 결심했다. 교장선생님, 우리 친해지지 말아요. 저는 당신과의 대화를 포기합니다. 낯가림으로 경직돼있던 얼굴근육이 본격 사생활 파헤치기 인터뷰 덕분에 더욱 딱딱하게 굳어버린 나는 살짝살짝 내보이던 대외용 웃음마저 잃어버리고 말았다. "○○선생님 남편은 무슨 일 하세요?" "○○선생님은 아이가 하나인가요? 아이가 둘은 있어야지." 요즘은 명절에도 이런 이야기는 돈 내고 물어야 하는데. 교장 선생님 지금 가산탕진의 위기입니다.


교장선생님, 우선 저한테 40만원 주세요.


(교)장스패치는 내겐 결혼여부를 물었다. 아니라는 대답이 나옴과 동시에 장스패치는 갑자기 내가 무척이나 친근해졌는지 반말조의 대화로 분위기를 전환했다. 혼기가 찼으나 결혼하지 못해 상투를 틀 수 없었던 꼬꼬마에겐 당연한 대접인 것인가. 차라리 차도 너네가 타먹으라고 하지.


차는 내가 타줄게, 누구부터 신상 털어놓을래.


숨막혔던 20분의 취조를 마치고 교장실을 나오며 이런 말도 안되는 무례를 대화의 소재로 삼는 리더에겐 더이상 기대할 것이 없겠다는, 섣부르지만 단호한 판단을 끝냈고 선생님들에게도 실망감을 토로했다. 평화주의자인 한 선생님은 그래도 인사기록 보고 이것저것 미리 준비한 자세는 좋게 봐줄 수 있지 않겠냐고 하셨지만, 그런 준비엔 부지런하지 않아도 괜찮았다.



내가 기대한 20분은 학교생활에서 어려운 건 무엇인지, 요즘 교사로서 어떤 것들을 고민하고 있고 해결하고 싶은지, 교장에게 협조를 구할 부분은 없는지 등을 함께 나누는 것이었는데 장스패치로 채워진 시간이라니...아쉬움을 넘어선 속상함이 며칠을 갔다. 그후로도 몇 번 이야기 나눌 기회가 있었으나 대화의 패턴은 늘 비슷했고 그에 대한 내 인식도 더 딱딱히 굳어갔다.


그런 얘기라면 듣고 싶지 않습니다. 귀틀막.


그렇게 6개월이 지났다. 그 사이에 교장선생님도 자신의 역할을 차근차근 해냈고 학교엔 이런저런 변화가 있었다. 대화상대로서의 그는 여전히 난감했지만 리더로서는 유연하고 합리적이었으며 교사의 입장에 서서 여러 편의를 봐줄 줄 아는 사람이었다.



마음 맞는 선생님들과 그런 모습에 대해 얘기하며 '깊은 대화 나눌 일만 없으면 좋은 리더'라는 우스갯소리를 하기도 했다. 모든 사람이 그렇듯 그에게도 다양한 정체성이 존재할테니 한 영역의 미달이 다른 영역의 미달로까지 연결되는 건 아닐 것이다. 오히려 어떤 영역은 무척 탁월할 수도.



며칠 전 학년별로 행사가 있던 날, 격려차 방문한 교장선생님을 만났다. 준비를 하고 있는데 갑자기 잠깐 이쪽으로 와보라며 조용히 나를 부르셨다. 그러더니 "지난 번에 ○○ 때문에 좀 속상했지?" 하시더라. 몇 달 전 조금 속상한 일이 생겼는데 결과적으로는 누구의 잘못도 아닌 문제라 당일에 잠깐 아쉽고 말았었다. 그런데 그 일을 언급하며 내 마음을 살피는 문장을 들으니 사라진 속상함도 다시 위로받는 기분이었다. 아, 내 생각보다 훨씬 섬세한 사람일수도 있겠구나.



어제는 '토니 에드만'이란 영화를 봤다. 세대와 가치관의 간극을 좁히지 못하는 딸과 아버지의 이야기였다. 도무지 이해할 수 없을 것 같던, 그저 불편하게만 다가오던 영화 속 아버지를 심적으로 점점 가까이 여기게 되면서 많은 어른들이 떠올랐다. 아빠도, 교장선생님도, 이해하고 싶지 않은 어른들도. 대화를 가로막는 가장 큰 적은 불통이 아니라 '단절'이라는 문장을 본 적이 있다. 어찌됐든 대화를 시도하려는 노력도 하지 않고 포기해버리는 것.


추천합니다. 정말 좋은 영화.


어른들은 한계가 있어, 어쩔 수 없어. 쉽게 말하곤 했다. 당연히 한계도 어쩔 수 없는 부분도 존재한다. 그들이 나를 볼 때도 극심한 온도차를 느끼는 부분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너무 쉽게 판단하진 않기로 했다. 내 기준에선 전혀 당연하지 않은 것들이 그들 문화에서 당연했다면, 그 당연함과 당연하지 않음 사이에서 변화를 위한 어떤 시도는 분명 필요하다고. 6개월 전 교장실로 다시 돌아간다면 난 어떤 시도를 할 수 있었을지를 고민해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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