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경애의 마음'을 읽고.
올해 초 친구와 3박 4일로 국내를 돌았다. 우리의 여행에는 늘 책이 있었는데, 여행의 계획을 세울 때 항상 '분위기 좋은 까페에서 좋아하는 책을 읽자'는 목록을 넣어두었다. 그 여행에서 내가 품고다녔던 건 '경애의 마음'이었다. 누군가는 여행을 기억나게 하는 요소로 음악을 사용하던데, 그래서 여행을 다녀와서도 어디선가 그때의 음악을 들으면 자연스레 여행의 시간들을 떠올리게 된다고 했다. 언젠가부터 나는 그 감각을 책이나 영화에 심어두고 있었다. 여행지에서 자기 전 본 영화들, 까페에서 본 책들.
3박 4일 중 이틀을 '경애의 마음' 완독에 쏟았고 이틀은 그 마음을 생각하며 지냈다. 책을 몇 장 넘기지 않은 순간부터 눈물샘이 고장난 듯 훌쩍이기 시작했는데 나중에는 둑이 터진 듯 쉴 새 없이 흐르는 눈물 때문에 코감기 걸린 사람처럼 굴다가 끝내는 엉엉 울며 봤다. 뿌얘진 눈으로 열심히 읽어내렸던 문장들이 계속 마음에 남아서 운전하다가도 눈물이 차오르는 순간까지 맞이했다. 친구는 책을 펼칠 때마다 울고 있는 나를 보고 "또 울어? 그 소설 대체 뭔데?"라며 웃었고, 나중에는 눈도 코도 빨개지고 퉁퉁 부은 내게 카메라를 들이대며 인터뷰 영상을 찍기도 했다.
"왜 그렇게 우시죠?"라는 친구의 질문에 눈물콧물 먹으며 "아 몰라. 너무 슬퍼." 해놓고 또 한참을 우느라 영상의 1/4은 조용하다. 와중에 "제가 어떤 말을 해도 이 소설의 좋음을 표현할 수 없습니다"라며 상황극에 몰입하자 왜 슬픈데 좋냐고 친구는 또 물었다. "슬픈 사람들이(훌쩍) 주저앉지 않고 결국에는(훌쩍) 일어나서 한 걸음 한 걸음 걷는 얘기라 슬프지만 슬프게 끝나지 않아(훌쩍) 잘 살 거라는 희망을 갖게 됩니다. 꼭 읽어 보십시오.(훌쩍)"
감정이 앞서 제대로 언어화되지 못한 마음들만 떠다니던 시간을 지난 뒤에는 좋아하는 친구들에게 틈만 나면 이 책을 추천하고 다니거나 혹은 이 책 읽었냐며 책의 감흥으로 소란한 마음을 함께 나눌 친구들을 찾아 헤맸다. 몇 달 전에는 생일인 친구에게 책 선물을 해주겠다며 몇 개의 선택지를 줬는데, 친구는 니가 그렇게 좋아하는 책 나도 한 번 읽어보겠다며 '경애의 마음'을 골랐다(누굴 위한 선물인가ㅋㅋ). 얼마 뒤 드디어 책에 대한 감상을 나눌 기회가 생겼는데 친구는 나의 경애사랑을 잘 이해하지 못하겠다고, 자신에겐 스토리라인이나 감정이 잘 잡히지 않는 희미한 얘기였다고 했다. 띠로리로.
자신의 감정이 부정당하는 기분이 들면 사람은 상대를 이해시키기 위해 말이 많아지게 되니까. 나 역시 많은 말을 했다. 나는 왜 이 소설이 좋았는지 이해시키고 싶었고 친구는 왜 나만큼의 마음이 아니었는지 이해하고 싶었다. 그러다 깨달았다. 내가 등장인물들을 얼마나 아끼고 사랑하는지. 어떤 면에서는 소설 속 인물들로 그들을 바라본 것이 아니라 과거의 나를 투영시켜 살폈기에 더욱 동화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을. 어느 순간 그냥 그들의 편에 서버리게 된 것이다.
이 소설의 등장인물들을 매력적이라고 말하긴 어렵다. 오히려 반대에 가까우며 현실에서 이들을 만났다면 사랑은 커녕 '왜 저래 진짜'하며 불편함만 키우는 관계가 됐을지도 모르겠다. 매력적인 사람들이 아닌 것을 넘어서서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는 시구처럼 최선을 다해 면밀하게 관찰해야 그들의 섬세한 속내에 접근이 가능한데, 사실 누군가를 그렇게 이해하려고 성실하게 노력하는 일이 현실에서 얼마나 가능할 수 있을까. 소설이라 들여다볼 수 있었던 마음들이다. 하지만 그래서 좋았다. 그 귀한 경험을 하게 해줘서.
경애는 어느날 상수를 바라보며 생각한다. '그가 그렇듯 갈등하는 것에 고유한 윤리가 있다고 느꼈다. 오히려 자기 마음의 질서가 있는 사람이었고 다만 그런 자기윤리를 외부와 공유하는 데 서툰 것뿐이었다.' 나 역시 그들을 그렇게 느꼈다. 자신만의 중심이 있는 사람. 그 중심의 우선순위에 인간의 존엄과 타협하지 않는 도덕적 올바름을 두려하는 것. 언젠가 한 책에서 '이 길과 선택이 나를 더 크게 만들까 작게 만들까? 라는 질문에 따라 행동해라'라는 구절을 읽은 적이 있다. 그들의 윤리는 자신만을 위하며 내부로 향하는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너를 위해, 우리를 위해 바깥으로 향하는 그래서 남들에게 이해받지 못할 선택이라도 결국엔 나와 우리를 크게 만들기 위한 노력을 하는 사람들이었다.
아마 그들이 그런 마음을 지키기 위해 애쓴 데에는 감히 짐작할 수도 없는 상실을 겪었던 것이 큰 이유로 작용했을 것이다. 삶이 통째로 무너져내릴 것 같은 상실을 어떻게 통과할 수 있을까. 평생 '통과'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좀 더 '견딜' 수 있는 힘은 사람과 사랑을 통해 가질 수 있다. 무언가를 하지 않아야 살 수 있는 삶에서 하는 것이 가능해지는, 그래서 조금씩 일상을 회복해내는 힘은 우리가 서로의 '지지대'가 되어 마음을 포개었을 때 가능하다. 경애가 상수를 떠올리면 힘을 생각하게 되고 힘이 있어야 한다고 다짐하게 되는 이유도 그런 것이 아닐까.
이 선하고 투박한 사람들, 그래서 더 다칠 수밖에 없는 존재들이 조금은 더 행복했으면 함께 더 많이 따뜻했으면 하는 간절한 바람을 갖게 해주는 소설이었다. 나는 매력자본이 넘치는 사람들보다 이렇게 모나고 거친, 그렇지만 속은 누구보다 따뜻한 사람들이 좋고 마음이 더 간다. 그들의 마음이 세상에 더 많이 보였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