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여름, 오랜만에 P군을 만났다. 그는 서른이 되기 전까지 남사친이라고는 한 손에 꼽을 수준이었던 내게 소중한 한 손가락이 되어준 사람이었다.
우리는 대학 OT에서 선후배 사이로 만났다. 한 해의 에너지를 온 힘을 다해 3월에 쏟아낼 만큼 열성적으로 놀았던 대학시절, 우리 동기들의 화두는 '후배'였다. 올해는 어떤 귀엽고 살가운 후배가 들어올까. 나와 친구 H는 2, 3학년 때 과의 행사를 진행하는 집행부에 소속돼 있었다. 2학년 때는 선배들을 도와 잡일을 하는 '차장'이었다면 3학년은 행사 준비에 직접 나설 수 있는 '부장'의 직책을 달고 뭐라도 된 양 스스로 취해있을 때였다.
OT 둘째날 뒤풀이 한다며 못 마시는 술을 벌컥벌컥 들이킬 때 P는 우리 조에 있었다. 선배의 권력을 그렇게 써야 된다고 못된 것만 쏙쏙 집어 배운 나는 취기가 올라 신입생 P의 빈 종이컵에 콸콸 소주를 부었고 어서 마시라며 권하다 내가 먼저 취해버리고 말았다. P는 그때 내가 참 이상하고 무서웠다고 했는데 첫인상부터 그렇게 박혀버린 사람이랑 이때까지 친하게 지내준다니 그저 고마울 따름이다.
그는 어떤 말이든 귀엽고 웃기게 하는 재주가 있었다. 말재간이 뛰어났고 적재적소에 자신을 낮춰 개그를 찔러넣는 능력이 탁월했다. 나는 이때까지 P만큼 말센스가 있는 사람을 본 적이 없는데, 만약 그를 넘어서는 자가 등장한다면 당장 고백할 각오가 되어있다!!!! 그는 말투도 귀여웠는데 문장의 끝마다 이응을 붙이는 습관(?)이 있었다. 습관이라 하기 애매한 지점은 그가 만들어낸 행동이 아니라 그것 역시 그냥 자연스러운 그였기 때문인데, "아, 힘들어써요옹" "그렇더라구요옹" 같은 식이었다. 그 자음을 종성으로 뱉어내는 문장들은 어떤 내용을 담고 있든 한결 귀여워졌고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경계를 와르르 허물게 했다. 아, 이 정도 서술이면 나 얘를 사랑하는 거 아닌가? 갑자기 혼란이 온다.
나와 친구 H는 P와 1년에 한 번씩은 꼭 만났다. 우리가 만남의 횟수에 좀 더 집착했다면 주기를 더 줄일 수도 있었겠지만 다행히도 우리의 무던함과 살가움의 정도는 비슷했고, 언제 만나든 어색하지 않은 몇 안되는 상대이기도 했다. P는 참 좋은 대화파트너였는데 어떤 주제든 넘나들 수 있는 유연함이 있었고 무엇보다 가장 매력적인 장점은 솔직하다는 것이었다. 그 솔직함에 기대 우리는 참 많은 얘기들을 나눴고 다음 만남 때 나눌 얘기들을 더 기대하게 했다. 우리의 성장과 실패를 담백하게 나눌 수 있는 시간이 좋았다.
그런 P가 작년 여름 꺼내놓은 화두는 '상담'이었다.
"누나들은 최근에 가장 잘 했다고 생각하는 일이 뭐예요?" "글쎄. 뭘까..너는 뭔데?" "저는 상담이에요. 요즘 상담을 쉬고 있었더니 다시 받아볼까 싶어요." "뭐가 그렇게 좋았어?" "저를 더 잘 알게 됐던 거? 꼭 상담이 아니어도 심리검사는 한 번 받아보면 좋은 것 같아요. 내가 궁금한 사람들은 살면서 한 번은 이 검사 받는 거 정말 추천해요. 누나도 자신을 궁금해하는 사람이니까 받아보면 좋을 것 같은데요?" "그래? 얼만데? 어떻게 받을 수 있어?(이미 넘어감)"
P는 며칠 뒤 바로 상담선생님 전화번호를 알려줬다. 문자로 협의해보라고. 내가 좋아하는 P의 말이니 아묻따(아무것도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로 홀랑 넘어간 것인지, 당시의 내가 누군가에게 속내를 훌훌 털어놓고 싶은 갈급함이 나도 모르게 차 있었던 것인지, 어떤 힘이 나를 그리도 빠르게 행동하게 했는지 그 선후관계는 잘 모르겠다. 시간이 흐른 뒤 생각해보니 알 것도 같지만 그때의 나에게 P의 말이 강력한 울림으로 다가왔기에 지금의 나도 있음은 확실히 알겠다. P는 여러모로 나의 은인이네.
안녕하세요 선생님! 제 이름은 K이고요 P(친구) 소개로 연락드렸습니다 선생님 너무 좋은 분이라고 말씀 많이 들었어요!
제가 MMPI검사와 분석을 좀 받고 싶은데요, 그 이후로 필요하다면 상담도 몇 회 받고 싶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