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 속 금주의 풍경
2016년 1월, 필라델피아 미술관에서 발견한 가장 인상적이었던 작품.
여행을 하면서 짧은 기간에 계속해서 비슷한 규모와 비슷한 전시 컨셉의 대형 미술관을 다녔더니 훌륭한 작품들을 보는 것도 시들하고 지루해졌다. 이곳에서도 그저 흔한 인테리어 소품 보는 것처럼 작품들을 스치듯 지나치며 보다가 이 그림을 발견하고는 멈추어 서지 않을 수 없었다. 우선, 미국 미술관에서 만난 너무나 미국적인 풍경이었다. (왜 이렇게 미국 미술관에는 유럽 미술만 많은 것일까) 과거 미국 시골의 모습을 상상하면 이런 모습이 아닐까 싶은 그런 정형화된 이미지지만 어딘지 모를 긴장과 이질적인 느낌이 묘하게 끌어 끌어당겼다.
드라마 ‘초원의 집’이 연상되는 평화로운 시골 풍경 속에서 우유통을 들고 있는 여인이 있고, 주위를 잠시 배회하던 남자가 다가와 한 국자 떠달라며 목을 축인다. 그녀의 넓은 어깨, 근육질의 팔, 햇빛으로 그을린 피부는 자연 속에서 분투하며 일하는 인간의 강인함을 드러내고 있다. 맞은편의 남자는 그늘진 얼굴에 이완된 자세로 그녀와는 대조적인 느낌을 보여준다. 그의 모습은 어떻게 보면 남자 옷을 입고 일하는 여성의 실루엣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래서 익숙한 듯, 익숙하지 않은 듯한 묘한 긴장이 흐른다. 그들을 감싸는 빛과 바람까지도 바싹 말라 건조된 것 같은 정적인 느낌도 그 긴장을 더한다.
그림의 제목인 temperance(금주, 절제)는 중의적인 의미를 갖고 있다. 두 남녀가 서로의 시선을 피하는 모습에서 건전한 만남이라는 뜻이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교묘하게 금주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우유통에 담긴 액체가 우유 아니고 술이고 그녀가 몰래 술을 나르고 있었을 수도 있는 상황을 암시하고 있다. 그래서 여성이 다소 긴장되어 보이고 남자는 살짝 취해 나른한 자세로 서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상상을 해 볼 수 있다.
미국에서 금주령이 발효된 것은 1920년대이지만 그 이전부터 만연한 알코올의 소비가 문제가 되었다. 중서부 지대에는 옥수수를 재배했고, 이를 운반하다가 상하는 걸 막기 위해 농부들이 옥수수를 위스키로 만들어서 팔기 시작했다고 한다. 덕분에 1820년대에는 위스키가 25센트였다고 하는데 이는 당시 차나 커피, 와인, 맥주, 심지어 우유보다 더 싼 가격이었고 금주령이 발효되기 전까지 이런 상황은 지속되었다. 그림은 은근하고 은밀한 태도로, 겉으로는 평화로운 분위기지만 사실은 위태롭게 취해있던 사회분위기를 그대로 옮긴 것일지도 모른다.
이 그림을 그린 윈슬로 호머는 1836년 보스턴에서 태어났다. 20살 때부터 20년간 삽화가로 일했고, 남북전쟁 당시에는 통신원 자격으로 전쟁의 모습을 사실주의적으로 기록했으며 이때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1880년 이후 미국 메인주 시골 어딘가로 은둔해 살면서 작품들을 제작했는데 그의 대표작들은 이 시기에 만들어졌다. 주로 웅장한 자연과 그 안에 사람들과의 역동적인 관계를 주제로 삼았다고 한다.
자체 금주령을 내린 지금 무려 6년 전의 글을 보니 기분이 이상하다. 마침 그때 미국 맥주 사뮤엘 아담스를 마시며 새해 계획으로 금주는 없다! 고 호기롭게 부르짖었는데, 습관적으로 마시면서도 나는 절제할 줄 아니까...라고 변명을 늘어놓곤 했다. 하지만 절제가 되었던 적이 있었던가? 술은 습관으로 고착되고 양은 점점 늘어버렸다. 하지만 이 그림처럼 같이 술을 나눠 마실 친구가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은 여전히 든다. 혼자 음습하게 말고, 햇살 아래에서 피크닉 매트 깔고, 사람들과 이야기하며 나른하게 이리저리 뒹굴 수 있으면... 이래서 금주가 힘들다 항상 좋은 기억이 떠오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