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 작품 속의 몸
Sylvia Sleigh(1916~2010)는 70년대 페미니즘의 영향을 받아 남성 누드를 그리기 시작했다. 그녀의 작품은 누드를 통해 예술을 구현한다는 전통적인 미술사의 역사에서 가려졌던 여성의 시선을 담고 있다. 여성 예술가들이 남성의 누드를 그리는 것은 과거로부터 대략 20세기 초반까지는 금지된 것이었고, 이후에도 뭐랄까 약간은 금기시되었는데 그녀는 이런 전통적인 공식에 반기를 들었다. 여성의 몸을 에로틱한 시선으로 보고, 대상화하고, 이상화하는 그런 작품들이 ‘당연히’ 예술로 소비되어 왔었는데, 여성이라고 남성의 몸을 볼 때에 에로틱한 시선을 가지지 못할 이유는 또 무엇이란 말인가. 그녀의 작품에서 남성의 모습은 마치 (그간 예술작품에서 등장했던) 여성이 나르시시즘에 빠져 약간은 흐느적거리고, 유혹하는 듯한 모습으로 등장한다.
“사실 인간의 몸은 이런 것이야. 태닝을 하면 자국이 남고, 털도 있고, 여기저기 결점도 있고 그렇게 위대하지는 않아.”라고 말하는 것처럼
이렇게 턱 하니 던져놓는 태도가 좋다.
여성의 몸은, 특히나 예술 작품에서는 이상화되고 성적 대상화된 육체로 표현된 경우가 많았다. 특히 체액의 분비나 배설의 측면은 외면하고픈 진실이 아니었을까. 오죽하면 예전에는 여자들은 이슬만 먹고사는 줄 알았다는 말이 있지 않았던가. 여성의 아름다움, 신비로움을 찬양하느라 살아 숨 쉬고 먹고 싸는 생명의 몸을 애써 감추었고 여성 스스로도 이런 생명 현상을 부끄러워하는 경향이 있긴 하다. 키키 스미스의 이 작품은 페미니즘 작가로서의 면모나 작품의 경향성은 차치하더라도 소변을 유리구슬로 표현한 조각가로서의 탁월한 선택도 주목할 필요성이 있다. 몸은 왁스로 만들었지만 거기에서 배출되는 물질은 다른 재료를 사용하였다. 쉽게 구할 수 있고, 깨지기 쉬우면서 영롱한 (냄새도 나지 않고) 유리라는 재료야말로 소변을 표현하는데 효과적이다. 하버드 대학교 포그 미술관Fogg Museum 1층에 전시되었던 (2015년까지도... 그런데 요샌 뭐 전시하는지 알 길이 없...) 이 작품은 우리의 몸을 정면으로 바라보게 만든다. 여성의 몸이 더 아름다울 이유는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