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arry Poons의 Night Journey를 추억하며
나는 선물로 받은 책의 내용이 내 인생에서 실제로 일어날지도 모른다는 이상한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 징크스란 꼭 어떤 이유나 변명거리를 들어 그것 때문에 자기 인생이 꼬인다는, 일종의 남 탓인데, 반대로 생각하면 이것만 피하면 안전할 거라는 얕은수이기도 하다. 운명을 관장하는 신이 있다면 그가 놓는 덫을 피하는 방법을 알면 좋을 것이다. 그래서 지난 인생을 돌이켜 보고 혹시나 있을지 모를 패턴을 샅샅이 찾아보게 된다. 나도 안다. 엉터리 법칙이고 과도한 의미부여라는 것을.
이 법칙을 선물로 받은 모든 책에 적용시킬 수도 없다. 영영사전 같은 경우는 어떻게 해석한단 말인가. 책장에는 누가 줬는지 잊을 수 없도록 아주 또렷한 필체로 책 옆면에 선물을 준 자기 이름을 크게 적은 책이 있다. 역사책이었다. 그 책의 내용도 절대로 현실에서 일어나지 않았다. (일어나기에 너무 많은 내용이 있으니까) 지인이 『나는 가해자의 엄마입니다』를 선물로 주고 싶다고 했었다. ‘휴. 미리 주기 전에 말씀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내가 이 책을 쓴 엄마처럼 무서운 운명에 처하게 될까 봐 선물로 받지 않겠다고 한사코 거부를 했다. 읽고 싶었던 책이었기 때문에 나중에 직접 사서 읽었다. 읽고 싶다 보니 내가 사서 읽으면 ‘무사하다’는 법칙 또한 예외로 만들었다. 이렇게 징크스에 얽매여 어떤 불길한 징조가 느껴지는 내용이나 제목의 책은 선물로 받게 되면 읽지 않고 쌓아 둔다. 책에는 죄가 없다. 징크스에 집착하는 내가 문제지.
하지만 인생에서 너무 가슴 아픈 일들은, 그 사건을 예고하는 것처럼 책을 통해 먼저 메시지가 전해지고 말았다. 읽으면 이루어질 것이라고 예감하면서도 마력처럼 끌어당겨 읽을 수밖에 없던 책이 있었다. 소피 칼의 『시린 아픔』, 바바라 러셀의 『나의 라디오 아들』이 그랬다. 시린 아픔에는 이 책을 쓴 소피 칼 뿐 아니라 익명의 다수가 쓴 사연들이 함께 병치되어 있으니 그 안에 있던 이야기들 중 무엇이라도 일어날 수 있었지만, 책을 준 친구가 징크스를 알면서도 줬으니 가슴에 비수를 꽂은 격이었다. 『나의 라디오 아들』은 아스퍼거 증후군이 있는 아들을 낳아 기른 엄마의 인생 이야기를 전하는 책이다. 평생에 걸쳐 가슴 먹먹한 어떤 징후를 들여다본 경험이 담겨 있었다. 이 책들을 받는 순간 누군가의 손길과 마음을 통해서 하늘의 메시지가 전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나는 운명론적인 계시를 믿어버림으로써 이 막막한 세상 속에 하나의 규칙을 만든 것이다. 읽느냐, 읽지 않느냐로 내 운명을 선택한다는 통제감이 생기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두 책은 왜인지 모르게 그냥 읽어버렸다.
이 징크스의 시작은 23살 무렵이었다. 당시 사귀었던 친구가 『1945년 이후의 미술사 Movements in Art Since 1945 (World of Art)』 (Lucie-Smith, Edward, Thames & Hudson)라는 책을 선물로 줄 때만 해도 나는 그림에 큰 관심이 있지 않았다. 고등학교 때부터 조금씩 흥미를 가졌지만 그 관심을 발전시켜서 깊이 있게 빠진다든가 공부를 한다든가 혹은 일상의 일부가 될 만한 취미로 발전시키지는 못했다. 그 친구와 사귀고 있을 무렵에는 데이트를 하느라 바빠 책을 들춰보지도 않았다. 어느 날 우리는 스키장에 갔다. 운동을 잘하지 못했던 나는 스키장에 가면 할 일이 없어서 지루하다고 가기 싫다고 했고, 그 친구는 자기가 타는 걸 봐달라고 했다. 잠깐만 타고 함께 맛있는 거 사 먹고 시간을 보내면 된다고. 하지만 결코 내가 누리지 못할 타인의 자유와 활력을, 나는 멍청하게 우두커니 서서 꽁꽁 얼어붙은 채로 지켜보는 것은 비참한 일이었다. 낭만적인 시간을 기대하고 갔던 여행이었지만 서먹해져서 돌아왔다. 그것이 징조였다. 모든 연애의 끝은 결혼이 아니면 이별이라고, 나의 연애 또한 방치해버린 책처럼 결국은 이별을 향해 가고 있었다.
헤어지고 한참 후에 책을 들춰보았다. 이별의 아픔 때문에 바로 읽지 않은 건 아니고 사실 영어로 된 원서여서 부담스러웠다. 마음이 덤덤해졌을 때 읽기 시작했지만, 여전히 미묘한 감정은 혼재해서 아련한 감성에 젖었던 것도 같다. 책장을 넘기던 중 한 그림에 유독 마음이 갔다. 래리 푼스의 Night Journey라는 작품. 어둠 속에서 빛이 뿜어져 나오는 것처럼 혹은 빛이 어둠으로 스며들어가는 것처럼 은은하게 빛이 퍼지는 분홍빛, 노랑의 색면이 세로로 분할되어 있었고 그 위로 타원형의 점들이 떠 있듯 위치해있다. 함께 달렸던 고속도로의 점멸하는 가로등 불빛, 그리고 차 안에서 울려 퍼졌던 음악의 리듬감 같은 느낌이 이 그림에 담겨있는 거 같았다. 만일 실제로 보았더라면 큰 그림 속에 푹 빠지듯이 온통 휩싸여 전율을 하지 않았을까. 이런 장밋빛과 온화한 불빛의 따스함이 시린 밤바람과 대조되는 밤의 도로 풍경이 연상되어 마음 한구석이 아릿하기도 했었다.
『1945년 이후의 미술사』는 ‘world art’라는 부제에서 세계 미술사를 다룬다고 밝히지만 유럽과 북아메리카 대륙 서구권의 미술의 흐름을 살펴보는 책이었다. 당시 내가 접한 자료 중에서 이 책이 가장 자세했고, 최신이었으며, 그 안에서 나의 취향에 꼭 맞는 작품들을 발견할 수 있었다. 이후 홀린 듯 전공을 바꿔 미술사대학원에 진학했고, 특별히 더 관심을 가지고 접근한 분야도 이 시기의 현대미술이었다. 짧은 연애는 끝났어도 다른 종류의 사랑은 남았다. 그것은 내가 그 책을 선물로 받을 만큼 지속적으로 관심을 표현하던 어떤 장르와 취향이 있었기 때문이고, 인간관계의 변화로 내 안의 것까지 쉽게 흔들리지 않았다. 책의 징크스가 있다면 결국 그건 내 안에 한결같이 흐르는 관심의 발견이고, 결국 하나의 선택이 다른 것으로 이어지는 결과를 보여준다는 것이다. 좋은 일이든 불행한 일이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