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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명선 Dec 24. 2024

내 스타일 언니들과 즐거운 운동을

 나는 여성 전용 운동클럽에 다닌다.

 원체 아침형 인간이 아니며 낮에는 기본적인 집안일을 하고 점심 약속도 자주 있어서 늦은 오후나 저녁 시간에 운동을 하러 간다. 기구에 앉아 냉장고 속 재료를 기반으로 저녁 반찬을 궁리하고 집으로 오는 길에 슈퍼마켓에서 필요한 것을 산다.

 여기에 2년 가까이 다니다 보니 낯익은 얼굴들이 생겼다. 몇몇 회원들과 인사를 나누 가끔 스몰토크를 하만 친해졌다고 할 만한 사람은 아직 없다.

 부담 없는 근력운동과 어렵지 않은 유산소운동으로 꾸려진 클럽의 특성상 대부분의 회원은 내 연배나 나보다 살짝 언니들(그들은 나를 보며 언니라 생각할 수도 있다)인데 더 가까워지지 않는 것은 의외다.

 나는 자동차 서비스 센터 대기실이나 병원에서 처음 본 여성과도 수다를 떨 수 있기 때문이다.   


 저녁에 송년 모임이 있어서 오전 11시에 운동을 하러 갔다.

 그 시간에 간 적이 거의 없었는데 내가 주로 가는 시간대와 분위기가 달랐다. 계단을 올라갈 때부터 시끌시끌한 소리가 들려서 무슨 일이 났나 싶었는데 센터에 들어서자마자 멈칫했다. 십여 명의 회원들이 운동을 하면서 큰 소리로 대화를 나누고 있었기 때문이다.

 운동화를 갈아 신으면서 분위기를 살폈다.

 지난가을 이후 못 본 사람있었다. 다 같이 왔다가 내가 운동을 시작할 무렵에 우르르 빠지던 무리의 오피니언 리더였는데 오전 타임으로 옮겨서 안 보였던 건지 그 시간에 목소리를 높이고 있었다. 

 게다가 바로 옆자리도 아닌 직선거리로 10미터는 족히 떨어져 있는 기구에 있는 사람들도 건네보며 대화를 했다. 클럽 안에는 경쾌한 음악이 크게 나오기 때문에 웬만한 데시벨의 목소리는 잘 들리지 않는다.

 요란한 비지엠을 뚫고 난사하는 수다라니 이 분위기는 뭐지? 

 그야말로 회원 대화합의 장이었다.


 한 분이 양손에 뭔가를 들고 들어오다 나와 눈이 마주쳤다. 회원님은 구석에 세워진 크리스마스트리로 다가가더니 장식들 사이에 손에 들고 온 작은 바구니들을 걸었다.

 

 -자, 여기 초콜릿 걸어 놨으니 하나씩들 드세요!

 

 말없이 운동을 하는 것은 나 포함 두 명뿐이었다. 

 그나마 댄스나 수영 같이 정해진 자리가 있는 게 아니고 둥그렇게 배치된 기구를 공평하게 돌아가며 하는 방식이라 다행이다. 사람들이 친목을 하든 말든 나는 내 운동을 하면 된다.

 여기도 만약 '더 좋은 위치'가 따로 있었다면 클럽의 주도권을 쥔 몇 사람의 전용이 됐을 수도 있겠다.  



 십수 년 전에 나는 요가 스튜디오에 다녔다. 요가원은 수업 시간과 요가 종류, 담당 강사님이 정해진 시간표대로 운영됐다.

 나는 사람의 체온보다 높은 온도의 스튜디오에서 하는 핫요가 수업이 특히 좋았는데 거기에서는 내 뻣뻣한 몸으로도 비교적 유연한 포즈를 흉내 낼 수 있었다.

   

 소위 '고인 물 회원'의 권력을 처음 경험한 곳이 그 요가원이었다.

 한쪽  전체가 거울인 스튜디오에 들어가면 거울을 등지고 강사의 매트가 중앙에 고정돼 있고, 강사와 거울을 마주 보고 회원들이 양팔 간격 6열 종대로 자리 잡았다. 매트와 물병을 들고 설레는 마음으로 처음 수업에 들어간 날, 사람들이 몇 자리에는 아예 앉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다. 선생님이 잘 보이고 거울도 가리지 않아 가장 좋은 앞줄에 빈자리가 있어도 매트를 다른 쪽에다 까는 것이었다.

 나도 앞줄의 빈자리와 별개로 뒷자리로 갔는데 더듬더듬 엉뚱한 포즈를 하는 초보자가 앞에 있으면 다른 분들에게 방해가 될 것 같아서였다.


 그 자리는 늘 정해진 사람들의 지정석이었다. 그들이 아무리 늦게 오더라도 말이다.

 그러던 어느 날이다. 뉴 페이스가 '권력의 삼각지대'에 태연하게 매트를 깔았다. 지정석 회원 중 한 명이 '그 자리 주인 있어요'라 상냥하게 알려주었다. 신입회원은 '정해진 자리가 없는 걸로 안다'는 취지의 말을 하고 그냥 있었다. 스튜디오의 공기가 어색했지만 신입회원은 그 분위기를 아는지 모르는지 아니면 상관없는지도 몰랐다.

 그 자리의 주인이던 배가 들어오자 조용했던 실내는 더 조용해졌다. 선배는 크게 한숨을 쉬더니 말없이 다른 쪽으로 가서 매트를 펼쳤다.

 더 조용해질 수 없을 것 같은 실내가 더더 조용해졌다.

 

 나는 요가 수업을 시간 하면 기운이  빠졌나보다 살은 많았던 선배수업이 끝나면 휴게실 소파를 차지하고 집에서 가져온 찐고구마 같은 것먹고 쉬다가 다음 수업에 들어가곤 했다. 그때 그들은 지금의 내 나이쯤 됐었을 텐데 체력도 좋고 몸매도 좋고 고난도 자세를 척척할 만큼 유연성도 좋았다.

 

 수업이 끝나면 곧바로 집에 오던 터라 뒷이야기는 알 수 없지만 다음 수업부터 다시 그 자리가 비워져 있었다. 뉴페이스는 다른 곳에 앉아 준비 운동을 했다.

 요가원의 암묵적인 평화였다.  

 


  원래 하던 대로 이른 저녁 시간에 운동을 갔다. 별다른 대화는 없지만 반가운 얼굴들이 있었다.

 어떤 모임에서나 우호적인 느낌을 주고 내 스타일인 사람들이 있기 마련이다.     

 얼굴은 닮지 않았는데 어딘가 우리 시누이를 떠올리게 하는 분이 내게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까딱한다. 옆 동네에서 버스를 타고 온다는 다른 회원님은 저번에 불쑥, '무릎을 꼭 붙이고 손을 잡고 스쿼트를 하는 내 모습이 하도 얌전해서 집에서도 생각난다'라고 말해서 다들 웃었다.

 원장 코치님은 점핑잭 몇 번, 러시안트위스트 몇 번 이런 식으로 오늘의 미션을 걸어 놓는데 그에 대한 의견을 나눌 때가 가끔 있고 대부분은 가벼운 인사만 한다.

 기구 체인지 알람과 흥겨운 BGM이 흐를 뿐 기구 사이의 공간을 넘나드는 수다가 없어서 마음 편했다.

 

 이번 출석 챌린지는 빙고 다섯 줄 완성하기이다. 회원님들은 빙고판 앞에서 짧은 전략을 고민하고 흩어졌다.

 오운완하고 오는 길에 소금기 있는 크래커와 맥주 한 캔을 샀다.

 운동은 언제나 가기 싫다. 가기 싫다는 생각조차 하지 말고 그냥 옷 입고 그냥 가방 메고 무작정 가야 한다.

 그렇게 일단 가면 동지들이 있고 나는 그럭저럭 또 할 것은 하고 온다.

 

 이름도 모르고 나이도 모르지만 혹시 내가 안 보이면 '얌전하게 스쿼트 하던 분은 오늘 안 나오시나?' 하며 궁금해할 그녀들을 생각하며 크래커를 뜯었다.


정신 번쩍-운동클럽에 있는 매서운 경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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