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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명선 Dec 10. 2024

모든 것이 딱 맞아떨어진 오해

 유독 몸이 무거운 아침이었다. 좀 더 자려고 오전 일정을 미루고 눈을 감았는데 휴대폰이 울렸다. 커버화면에 '관리과장님'이라는 이름이 떠 있었다.

 

 나는 우리 아파트의 평범한 주민이라 관리과장님에게 전화가 오는 경우는  관련 문제나 이웃집의 민원 이슈 외엔 있을 리가 없다.

 

 과장님이 용건을 말하는 몇 초간 머릿속에 여러 걱정이 지나갔다.

 여기는 25년 구축 아파트다. 아랫집에 물이 샜다고 해도 이상할 게 없다. 이 겨울에 엄청 피곤하겠는데 이거.


 용건은 차를 이동해 달라는 것이었는데(짧은 시간에 예측한 문제 중 가장 가벼운 이슈) 과장님의 분위기가  어색했다.

 내 목소리를 듣자마자 "여보세요? 어어?" 하더니 말을 멈추고 당황(?)하는 기색이었다. 차를 빼 달라는 부탁도 클리어하지  뭔가 미심쩍은 어투였다.


 나는 어제 새로 발견한 스폿에 주차를 했다. 지하주차장에 진입하다가 한쪽 구석에 별도로 큼직하게 마련된 공간을 발견했다. 

 벽면에는 각종 파이프와 통신회사 장비들이 빼곡히 부착돼 있었지만 정상 주차 자리 표시 외에 어떤 주의 문구도 없었다. 평소에는 늘 차가 서 있어서 몰랐구나 하고 사방 넉넉히 주차를 했다.

 게다가 차에서 내리자마자 천장에서 환하게 센서등까지 들어와서 깜짝 놀랐다.

 벽에 설비들이 많아서 등까지 달아 놨나 보네. 여기 아주 좋은  자리구만. 근데 여기 주차해도 되는 거겠지? 하고 올라왔다.


 그래서 내가 '주차장에 잘 댄 차를 왜 옮기란 거냐'라고 지 않은 것이다.



 주차장으로 내려가서야 '실내용 안경'을 쓰고 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나는 근시가 심한데 나이가 들며 난시에 노안까지 겹쳐 여간 불편한 게 아니다.

 바늘에  끼우기나 발톱 깎기 같이 미세한 장면은 마이너스 디옵터인 나안으로 보는 게 가장 잘 보인다(눈 나쁜 중년들이 뭔가 자세히 볼 때 안경을 올리는 이유다).

 나는 기본 다초점 안경과 실내용 안경을 따로 가지고 있다.

 집에 있는 시간이 많다 보니 살림할 때나 휴대폰과  보기에 좋은 실내용 안경을 새로 맞췄는데 눈이 편하다. 그러나 이 안경은 근거리용이라서 외출할 때와 운전할 때는 쓸 수 없고 안경사도 이 점을 여러 번 강조했다.


 실내용 안경을 끼고 어둑어둑한 지하주차장에 내려가니 시야가 막혔다. 

 안개가 낀 것처럼 주차장에 비상등을 켠 트럭이 있고 작업자들이 오가는 것이 보였다.


 나는 맘에 들었던 자리에서 쫓겨나는 게 아쉬웠지만 할 수 없이 차를 뺐다. 주차 자리를 물색하며 룸미러로 쳐다보니 과장님(으로 추정되는 실루엣)은 마침 들어오는 차를 안내하고 있었다.

 피곤하고 졸리지, 눈은 침침하지, 트럭 주변에서 내는 소음은 시끄럽지 이러다 남의 차를 긁기라도 할까 봐 최대한 여유 있는 공간을 찾아 주차를 했다.


  차를 뺀 자리에서 작업을 잘하나  깜짝 놀랐다. 자리에 크고 멋진 외제차가 떡 서 있었는데. 아까 과장님이 나서서  에스코트 한 바로 그 차였다.

 이게 무슨 상황인가, 혹시 작업자의 차인가 하고 다가가앞유리에 우리 아파트 주차 스티커가 붙어 있었다.

 

 설마, 이 차를 여기 주차하라고 나한테 빼라고 한 거야?

 그런 생각이 번뜩 들었다. 그래서 그렇게 분위기가 수상했구나. 처음 전화를 받았을 때도, 내가 차를 뺄 때도.

 일단 그 스티커의 동호수찍고 과장님을 향해 걸어갔다. 나를 보고 인사하는 과장님에게 단도직입으로 물었다.


 -과장님, 지금 저 차 주차하라고 저한테 차 빼달라고 하신 건가요?

- 네?


 과장님은 적잖이 당황했다. 

 그래, 그동안 이런 불합리한 행태에 목소리를 낸 사람이 없었겠지. 걸렸어.

 


 사건의 전말


 과장님은 우리 옆동의 같은 호 집에 할 전화를 내게 잘못한 것이었다.

  차의 차주를 잘 알고 있었기에 화를 했을 때 여자가 받아서 1차 당황을 했다고 한다.

(여보세요? 어어? 하며 분위기가 어색했던 이유)   그러나 상대가 아무  의심 없이 차를 빼 주겠다 해서 일단 전화를 끊었다.

 그런데 금방 오겠다던 차주는 안 나오고(그게 나였으니까) 갑자기 내가 내려왔다고 한다. '아침부터 어디 가시나' 했는데 내가 차를 빼더니 나가는 것이 아니라 어디다 댈까 주저하더란다. 그래서 '저 사모님은 잘 있는 차를 왜 옮기시지?'라고 의아하게 생각했다.

 그러는 중에 다른 주민의 차가 주차장으로 들어오길래 공사 차량을 피해 안내를 .


 잠시 후 내가 쌀쌀맞은 표정으로 다가오더니


 -과장님, 지금 저 차 주차하라고 저한테 차 빼달라고 하신 건가요?

 라고 물은 것이다.


 과장님은 그때서야 자기가 전화를 잘못했다는 것을 알았고 너무 미안해했다.

 나도 사과했다.


 -저는 업을 하는 줄 알고 얼른 빼드렸는데 다른 주민의 차가 서 있어서 오해를 했습니다.


 전화를 잘못한 건 과장님이었지만  이후 내가 만든 콩트였던 것이다.

 잠을 깨워 짜증이 났고 작업 차량을 보고 속단했고  안 보이는 눈으로 주차를 하려고 신경이 곤두섰고 과장님이 다른 차를 안내하는 것을 봤고 결국 넓고 좋았던 내 자리(?)에 냉큼 주차한 차를 봤다.

 그리고 일련의 들을 조합해서 우리 아파트가 '권력 남용 비리가 오가는 곳'이라고 오해했다.

 요즘 세상 돌아가는 꼴을 보면 별별 짓들이 다 있으니 나의 상상도 그렇게 오바라고는 보기 어렵지 않나.


 아무튼 내 탓이다.

 도끼 도둑 이야기가 있다. 아끼는 도끼를 잃어버린 농부가 옆집 청년을 의심했다. 의심을 품고 바라보니 평소에 성실해 뵈던 그 년이 인사하는 모습도, 일하는 모습도, 자기를 바라보는 표정도 다 도끼 도둑의 행태였다는 이야기다.


 침대로 돌아와 이제 소설 좀 그만 봐야겠다고 반성하는데 카톡이 왔다.

 지난달에 대출 예약했던 '소설책'이 집앞 도서관에.준비되었다는 메시지였다.


 모든 게 맞아떨어지는 하루다.

오늘 빌려야 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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