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네 지라르의 모방 매커니즘과 코제브의 헤겔 철학으로 보는 날씨의 아이
“정서의 가치는 치르는 희생의 값에 해당한다.” 이 말은 영국의 소설가 겸 극작가인 존 골즈워디(John Galsworthy)가 한 말이다. 희생은 특별한 언약의 관계를 맺기 위해 인간이 신에게 드린 제물을 의미하는 것으로, 고대 문명의 제물을 바치는 행위에서부터 신에게 봉헌을 올리는 행위까지 다양한 문화 및 역사적인 맥락에서도 이러한 희생이라는 개념은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이러한 희생의 개념과 맞물려 희생의 플롯은 고전적으로나 근대적으로 다양한 작품에서 어렵지 않게 접할 수 있는 플롯으로 자리 잡았다. 성경에 있는 아브라함의 이야기에서부터 한국의 전래동화인 “심청전”까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그 플롯의 형태를 찾아볼 수 있다.
그렇다면 과연 현대에 이르러서 희생은 어떠한 의미가 되었는가. 필자는 이 글을 통하여 희생의 개념을 다시 한번 정리하고 대중들은 이 희생이라는 플롯을 통하여 대중들이 무엇을 원하는지, 왜 그들이 좋아하는 플롯이 되었는지에 대하여 탐구하고자 한다. 더불어 탐구한 희생의 요소들을 통하여 신카이 마코토(新海誠) 감독의 애니메이션 영화 “날씨의 아이(天気の子)”에서 이러한 희생의 요소들이 어떻게 적용되어 나가는지 분석해보고자 한다.
희생이라는 것은 무엇일까. 현재의 많은 이들은 희생의 의미를 자신의 권리를 포기하는 행위나 억압받음 정도의 의미로 파악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전근대적으로 희생은 죽이는 행위에 불과하지 않고, 중요한 요소이자 원리로 작용 되었다. 희생은 어떠한 행위를 완벽하게 만드는 필수적인 단계였다. 르네 지라르(René Noël Théophile Girard)는 인류학적인 관점에서 대중들은 언제나 희생물을 찾아왔다고 이야기한다. 인류 내부의 갈등이 고조되고 위기감이 절정에 이를 때 이러한 절정을 해소하기 위하여 누군가의 희생을 갈구하였으며, 다양한 신화와 성경 속에서 희생 제물을 바치는 행동의 양상이 드러난다고 주장하였다. 그는 이러한 행위를 ’모방 메커니즘‘이라는 표현으로 나타내는데, 모방적인 욕망으로부터 시작하여 위기로 진행되다가, 어떠한 것의 희생에 따라 해결되는 모든 과정을 나타내는 것이다.
르네 지라르는 모방 메커니즘에서 나타나는 갈등이나 위기감을 인간의 욕망으로 취급하였다. “욕망은 그 대상을 같이 있게 만드는 타인에 근거하며, 이 타인은 곧 가장 가까이 있는 제삼자, 즉 이웃이다.”라고 이야기한다. 사람들은 이웃과의 경쟁의식을 통하여 다수가 공감하거나 존경하는 이웃의 형태를 모방하려 하며, 르네 지라르는 이를 ‘모방 욕망’이라고 정의내린다. 즉 희생이라는 행위가 인간의 욕망에서 발생하는 갈등의 해결을 위하여 발생하는 행위라는 것이다. 여기서 흥미로운 점은 모방으로 발생한 모방 욕망은 그가 모방하고자 하는 대상이 소유하거나 욕망하는 것을 욕망한다는 점이다. 지라르는 이러한 모방적 욕망은 엄격하게 개인적, 독창적이며 인간적인 것으로 본다.
지라르처럼 이런 모방적인 욕망이라는 것을 과연 인간적인 것이라 볼 수 있을까. 이에 대한 해답은 헤겔 철학을 해석한 프랑스 철학자 코제브를 통하여 확인할 수 있다. 러시아 출신의 프랑스 철학자 코제브(Alexandre Kojève)는 헤겔 철학에서 나타나는 욕망이라는 개념을 통하여 인간과 동물의 차이를 밝혀내는데, 이러한 과정에서 나타나는 인간의 모습은 르네 지라르의 모방 욕망에서 나타나는 욕망의 모습과 사뭇 비슷하다. 먼저 헤겔(Hegel, Georg Wilhelm Friedrich]은 주체로의 인간이 되기 위해서 자신이 처한 외적 환경, 자연(Nature)을 부정하여야 동물적인 현실에서 탈출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더불어 내적 존재인 욕망을 행동(Desire)을 통하여 끊임없이 투쟁하며 스스로의 주인으로의 자기의식을 획득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코제브는 이러한 욕망에 대하여 인간이란 생명을 유지하려고만 하는 동물적인 욕망에 대해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Man’s humanity “comes to light” only in risking his life to satisfy his human Desire―that is, his Desire directed toward an-other Desire. I want him to "recognize" my value as his value.
즉, 자신의 목숨을 잃는 한이 있더라도 극복해나가야지만 자기의식을 발현해낼 수 있다고 보았다. 이러한 자아실현을 통하여 나타나는 인간 욕망의 양상은 바로, 타인이 욕망하는 것을 욕망하는 것이다. 즉 타인이 자신의 가치와 나의 가치가 같다는 것을 인식하기를 원하는 모방의 심리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인간을 인간으로 만들어 내는 것이 바로 타인을 욕망하는 것을 욕망하는 것이라는 점과 르네 지라르의 ‘모방 메커니즘’에 따라 이러한 욕망은 결국에는 어떠한 갈등을 발생시키고 누군가의 희생을 통해서 해소된다는 점이다. 즉, 욕망으로 인하여 발생하는 희생이라는 행위 자체 또한 인간이 되기 위한 필수 불가결한 요소라는 것이다.
희생의 플롯은 이러한 갈등의 해소점인 희생이라는 개념을 작품에 잘 녹여 들게 하는 데 큰 도움을 준다. 즉 최고점에 이른 갈등 상황을 만들어 내고, 이러한 갈등이 해소되면서 성공적으로 작품을 마무리하는데 일조한다는 것이다. 대중들은 누군가에 의하여 희생당하는 주인공들의 모습을 보며, 혹은 자신을 희생하는 주인공의 모습을 보며 커다란 연민의 감정을 느낀다. 이러한 형태의 비극적인 상황에 대하여 관객은 강한 카타르시스를 느낄 수 있게 된다. 작품 속 주인공이 겪게 되는 여러 형태의 희생이라는 비극을 접하게 됨으로써 대상과 자신을 일체화하며 마음속에 쌓여 있던 부정적인 감정을 해소하고 정서적인 정화의 길로 인도되는 것이다.
희생의 플롯은 희생이라는 행위가 더욱 극적으로 보여주기 위하여 갈등을 최고조로 이끌어나가는 다양한 방법을 사용한다. 미국의 문학가 로널드 토비아스(Ronald Tobias)가 이야기하는 희생 플롯의 여러 장치를 잠깐 살펴보도록 하자. 그는 희생은 언제나 커다란 개인적인 희생과 함께 찾아온다고 이야기한다. 그것은 목숨이 될 수도 있는 급격한 심리의 변화로 나타날 수도 있다. 주인공은 자신이 해결해야 하는 문제에 대한 본질을 이해하지 못하지만, 그가 처해있는 상황 자체는 인물로 하여금 희생이라 하는 행동을 취하지 않을 수 없도록 몰고 가는 역할을 한다. 그렇기에 장소를 제한하는 등의 방법을 통하여 점차 긴장을 고조시키고 주인공으로 하여금 희생에 관한 행위를 취하도록 압력을 가한다. 아카데미상을 수상한 바 있는 헝가리 태생의 미국 영화 감독인 마이클 커티스(Michael Curtiz) 감독의 《카사블랑카》도 제2차 세계대전 중의 북아프리카 카사블랑카라는 도시의 릭의 술집으로 장소를 제한한다. 봉준호 감독의 《설국열차도 열차 안이라는 제한된 공간을 통하여 긴장감을 고조시킨다. 작품은 주인공에게 낮은 도덕적인 차원에서 숭고한 차원으로 변화를 겪으며, 이러한 변화에서 희생이라는 행위의 동기를 분명하게 만든다. 더불어 관객의 희생에 대한 영향의 관심과 의도한 결과를 불러왔는지에 대해 알고 싶어 하는 궁금증을 충족시키려고 한다.
그렇다면 이러한 희생에 대한 개념과 희생 플롯은 작품을 어떻게 조종하고 있을까. 분석 대상의 작품은 2019년에 개봉한 신카이 마코토(新海誠) 감독의 애니메이션 영화 “날씨의 아이(天気の子)”이다. 전작 “너의 이름은.(君の名は。)”에서 국내외 큰 흥행을 이끌었던 신카이 마코토의 다음 작품으로 주목을 받았으며, 애니메이션이지만 현대 일본 사회의 부정적인 모습을 보여주고 전통적 가치에서 바라본 변화된 세계에 대한 고찰을 담고 있는 작품이다. 영화의 주인공인 다이고 코타로(이하 ‘코타로’)는 자신이 지금까지 살았던 섬에서의 삶을 끔찍이도 저주하며 무작정 도쿄라는 도시로 상경하는 가출 소년 캐릭터이며, 그는 간절한 소망으로 날씨를 맑게 만드는 “맑음 소녀” 히나 아마노(이하 ‘히나’)를 만나 매일 비가 내리는 변해버린 세계의 날씨를 맑게 만드는 사업을 이루어가며 일어나는 비현실적인 일들을 담아낸 애니메이션 영화이다. 어찌 보면 희생이라는 플롯에 전혀 들어맞지 않는 것만 같지만 이 영화는 현대의 애니메이션 영화가 희생 플롯을 어떻게 작품에 담아내고 있는지 잘 보여주고 있다.
먼저 영화의 긴장감 조성이다. 작품 내에서의 도쿄의 모습은 전작의 아름답게 표현된 “너의 이름은.”의 신주쿠(新宿)의 모습과는 달리 현실적인 면모를 더욱 강조한다. 도쿄의 가부키초(歌舞伎町) 밤거리에 즐비한 유흥업소와 호객꾼들의 모습을 보여주기도 하며, 이러한 밤거리의 네온사인 빛과는 대비되는 어두운 장소에서 노숙하는 주인공의 모습을 담아내기도 한다. 더불어 주인공인 코타로가 끊임없이 되뇌는 말은 바로 도쿄는 무서운 곳이라는 것이다.
아마 이러한 현실적인 면이 부각되면서 이번 영화의 개연성이나 캐릭터들의 구체적 연유에 대하여 집중하지 않고 히나와 코타로의 마치 환상적인 이야기만에 집중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게 아닐까 싶기도 하다.
이러한 배경의 선택은 두 가지의 효과를 만들어 낸다. 첫 번째 부모를 여읜 ‘히나’와 ‘나기’의 가족과 같은 소녀 가장의 모습과 양육권 소송을 진행하는 스가 케이스케(이하 ‘스가’)의 모습과 맞물려 가장 현실적인 상황을 통하여 영화의 비현실성적인 면모를 강조해 나간다. 이러한 현실적 모습은 하늘의 떠 있는 섬과 물로 이루어진 하늘의 물고기, 투명한 우산의 공간과 같은 비현실적인 현상과 공간이 그 모습을 더욱 돋보일 수 있도록 돕는 역할을 한다. 두 번째로는 위에서 살펴보았던 긴강잠을 조성하는 것이다. 위의 예시들은 장소의 제한을 통하여 긴장감을 조성하여 낸다. 영화 “날씨의 아이” 역시 장소를 도쿄, 특히 신주쿠라는 부도심으로 제한을 하고 있기는 하지만, 충분하리만큼 등장인물들이 가깝게 유지되도록 거리를 조성해내지는 않는다. 하지만 장소의 부정적인 속성을 강조하면서 이러한 역할을 대체하여 나가며 긴장감을 형성함과 동시에 현실적인 모습과 비현실적인 모습을 번갈아 보여주며 관객들에게 현실에 대한 괴리감과 불편함을 지속해서 선사한다.
개인적으로는 신카이 마코토 감독이 표현하는 눈 주변의 움직임과 눈동자의 섬세한 움직임을 좋아하는 편이다. 소녀들의 몸짓이나 손짓, 발짓으로 섬세하게 감정을 그려내는 야마다 나오코(山田尚子) 감독과는 또 다른 매력이다.
영화에서는 이러한 긴장감을 지속적으로 부여하는 장치로 권총을 사용한다. 유흥업자에게 이끌려가는 히나를 구하기 위하여 코타로는 우연히 주운 권총을 사용하게 된다. 더불어 작품 속에서 불안한 눈동자의 움직임과 안구 주위의 근육의 섬세한 묘사를 통하여 이러한 긴장감은 고조 된다. 이 장면은 긴장감을 부여하는 장치로만 볼 수도 있겠으나, 잘 들여다본다면 캐릭터들의 희생과도 연관을 지을 수 있다. 코타로는 총을 사용하여 추적당할 위험을 희생하면서도 히나를 구하기 위해서 총을 발포한다. 더불어 이는 시골 소년이었던 코타로의 순수성의 상실이다. 이는 스가의 도움으로 도시 생활에 적응해가는 코타로의 당시 모습과도 맞물린다. 더불어 소녀 가장인 히나가 자신의 동생을 부양하기 위하여 유흥업소에 발을 디디려고 하는 것은 그녀에게도 사회로부터 자신의 순수성을 희생해야 한다는 압박을 받은 결과였다. 비록 이 장면에서 히나를 구함으로 히나의 희생은 벌어지지 않았으나, 코타로는 지속적으로 형사들의 추적을 받게 되는 결과를 만들어 낸다.
본 영화에서는 이분법적인 구조가 잘 드러난다. 신카이 마코토 감독이 대각선의 구도를 선호하는지는 모르겠으나, 이전의 작품 “너의 이름은.”과 “날씨의 아이”에서는 상하의 높이 차이로 구분되는 대각선의 구도를 지속적으로 관객들에게 보여준다. 더불어 이러한 차이가 점차 벌어지며 위와 아래라는 공간적인 차이는 점차 커져나간다. 코타로는 처음 섬을 탈출할 때 비가 내리는 것을 보기 위해 하늘을 쳐다보는 것 외에는 위를 쳐다보지 않는다. 더불어 도쿄에 도착하였을 때 그는 반지하의 계단을 끊임없이 ‘내려간다.’ 더불어 하늘에서는 위에서 아래로 끊임없이 비가 ‘내린다.’ 하강으로 점철된 코타로는 히나를 만나면서 상승한다. 히나를 만나 비상계단을 ‘오른다.’ 기묘한 도리이(鳥居, とりい) 앞에서도, 건물에 올라서도 그는 ‘아래’를 바라보지만, 히나가 기도를 올리며 날이 밝아지자 그는 그제야 ‘위’를 쳐다본다. 히나와 함께 날을 맑게 만들 때마다 그는 ‘위’를 바라본다. 물론 비가 오는 날에 맑아진다면 하늘을 쳐다보게 되는 것은 당연할 것일지도 모르지만, 중요한 것은 그렇게 하늘을 쳐다보게 되는 맑은 하늘을 만들어 내는 존재가 히나라는 사실이다. 반대로 히나에게 하강은 부정적인 의미이다. 그녀는 마지막 의뢰를 끝내고 하늘을 나는 경험을 한다. 그녀는 코타로가 보는 앞에서 ‘하강’을 하게 되고, 자신이 하늘에 의해 희생될 제물임을 깨닫게 된다.
더불어 ‘어른’과 ‘소년·소녀’라는 이분법적인 구조도 눈에 띈다. 코타로와 히나를 방해하는 요소는 바로 그들을 지켜준다고 이야기하는 ‘어른’들이다. 코타로는 총기 소지 혐의로 형사들에게 추격을 당하게 되고, 히나와 그녀의 남동생도 경찰에 의하여 아동보호기관으로 보내질 운명에 처한다. 이러한 어른의 행위는 그들로 하여금 도망이라는 방아쇠를 당기도록 만든다. 이러한 어른들의 사이에서 코타로와 히나는 둘만의 관계 속에서 스스로의 모습을 찾아 나간다. 이러한 자아 인식과 실현의 모습은 히나의 생일날 코타로 덕분에 자신의 의미를 찾을 수 있었다고 말하는 히나의 의하여 최고조에 달한다.
이러한 상하와 어른과 아이라는 이분법적인 대결 구도는 끊임없이 관객들에게 긴장감을 주입 시키며 희생될 자의 대가와 영향력을 점차 고조시켜나간다. 더불어 히나와 코타로의 관계가 점차 깊어지며 다른 등장 인물에게 미치는 영향조차 점차 커져 나간다.
여기서 흥미로운 점은 이러한 어른과 아이라는 이분법적인 대결 구도가 관객에게 긴장감을 주는 역할을 하는 것과 동시에 각 인물에 대한 정체성을 부여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들의 어른에서는 '자신'이라는 단어는 없는 것처럼 보인다. 나츠미의 이야기를 잠시 들여다보자.
그녀는 미스터리에 관심이 많아 보인다. 하지만 양복을 입은 채로 끊임없이 회사의 면접을 보며 회사마다 가고 싶었던 1순위의 회사였다고 이야기한다. 그녀의 정체성은 평범함으로 무장한 그러한 회사들과 어울리지 않는다. 그녀가 줄곧 떨어지는 면접 상황 속에서도 잠시 동안 웃음을 보이던 순간은 하늘에서 떨어지는 신비로운 물고기에 대한 조사 파일을 읽는 순간이었고, 그녀가 가장 흥분하던 장면 또한 하늘의 물고기가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장면과 고대의 그림을 조사하러 가는 순간, 스쿠터를 몰고 형사들을 피해 추격전을 벌이던 순간이었다.
스가도 마찬가지다. 그는 자신의 딸을 자주 보지 못하는 사별한 아내를 둔 인물로 나온다. 경찰의 타깃이 된 코타로에게 퇴직금이라며 몇만엔 지폐를 잡아주고 양육권 소송 중인 민감한 시기이니 집에 돌아가라는 이야기를 하며 그를 내쫓고 늙어가기 소중한 것을 바꾸지 못하겠다고 이야기하는 그는 천식을 가지고 있던 자신의 딸을 위해서 끊었던 담배까지 다시 피우며 괴로워한다. 더불어 형사가 자신의 사무소를 방문했을 때 자신도 모르게 눈물을 흘리는 등의 비정한 어른이라는 그가 보여준 모습과는 괴리감이 큰 행동을 펼쳐나간다.
나이라는 기준으로 아이와 어른이 구분되는 이러한 세상에서 그들은 표면상으로는 어른이지만 그렇지 못한 이들이다. 이러한 이분법적인 구조를 영화 내에서는 아이들의 모습을 통하여 부숴낸다. 코타로는 히나가 사라진 직후 경찰에 잡히고 그녀의 실제 나이를 알게 된다. 중학교 3학년의 나이. 이번 생일에 열여덟 살이 된다는 그녀의 말은 거짓이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코타로는 오빠인 내가 지켜주었다면서 울분을 토해내지만, 배를 굶주리던 코타로에게 햄버거를 제공해주고, 식사를 대접해주는 인물은 언제나 히나였다. 그녀는 열악한 소녀 가장의 현실에서도 아르바이트를 통하여 자신의 남동생인 나기와 함께 사는 삶을 지켜나가던 인물이었다. 더불어 코타로가 자신보다 한참 어려보이는 나기에게 선배라 부르며 연애에 대한 조언을 구하는 장면이나 자신의 누나에 대하여 훨씬 어른스러운 생각을 보이는 나기의 말은 나이로 구분되는 사회의 잣대와 이분법적인 구조를 일부 부숴 내버린다. 그들이 달려나가는 데에 나이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사회의 장치일 뿐이었다.
긴장감이 최고조에 이르는 와중에 자신의 의미를 찾았다며 하늘의 무녀가 되어 희생되는 히나의 희생과 정체성을 부정하는 이가 나타난다. 바로 코타로이다. 그는 자신이 부여한 히나의 정체성을 스스로 부정한다. 일반적인 희생의 플롯이었다면 히나의 희생으로 매일 비만 내리던 세계는 맑은 하늘을 되찾고 여타 평화로운 세상이 계속되어야 한다. 하지만 현대 애니메이션 영화인 이 작품은 이 플롯을 순순히 따라가지는 않는다.
코타로는 히나의 희생을 인정하지 않는다. 그녀를 구하기 위하여 도망치며 다시 또 권총을 사용하게 된다. 권총을 통하여 이전까지의 자신을 다시 한번 부정한다. 여기서는 히나에게 부여한 날씨를 맑게 하여 사람들을 웃게 한다는 그 정체성을 부정하는 모습이 아닐까 싶다. 코타로는 하늘에서 떨어져 내려온다. 히나와 함께. 그리고 맑은 하늘을 희생하여 자신이 되돌아가는 것을 부정하는 히나에게 코타로는 “너는 더 이상 맑음 소녀가 아니라며, 맑은 날을 보지 못하더라도 너만 있으면 된다”는 자신의 마음을 전한다. 지금까지 누군가를 위하여 기도하던 히나가 처음으로 스스로를 위하여 기도하여 지상으로 내려오는 장면이다. 땅에 내려왔을 때 그녀의 목걸이가 부서진 장면을 보여주는 것으로 보아 그녀가 결국 자신을 속박하던 책임을 내려놓고 진정한 삶과 역할을 찾아내었다는 것을 상징하고 있다고 본다.
이 작품을 가치 있게 생각하는 이유는 희생에 대한 취소이다. 희생을 취소하고 이전의 세계를 다시 희생시킨다. 세계는 끊임없이 우중충한 비가 내리고 저지대는 침수되어 인간의 새로운 삶의 방식이 시작된다. 하지만 이러한 결말은 관객들에게 받아들여진다. 기존까지의 세계를 희생하더라도 히나와 코타로의 행복을 지켜줘야겠다는 설득을 영화는 지속적으로 해왔고 그것은 성공하였다. 관객이 어떠한 것을 희생시키는 것에 동조할지 결정을 내리게 유도하는 장치로는 일본의 전통 사상을 전해주는 장면과 어느 할머니와의 대화 장면이 있다. 날씨의 무녀에 대해 취재를 나간 스가는 날씨의 무녀가 제물로 희생되어야 날씨가 되돌아온다며, ‘히나’에 대해 제물 한 명을 바쳐 정신 나간 날씨가 되돌아오면 찬성이며, 모두들 그럴 것이라는 대사를 외친다.
이 장면은 관객들에게 과연 ‘히나’의 희생이 정당한지 물음을 던지도록 만든다. 물론 공리주의적인 생각에서 히나의 희생으로 구성원들의 행복이 최대가 된다면 정당한 희생이라고 생각될 수 있는 있겠으나, 영화가 진행되며 히나라와 코타로라는 캐릭터와 관객들 사이의 거리는 너무나도 가깝게 변화되었다. 관객은 이러한 ‘스가’에 말에 동조하지 않게 될 것이다. 더불어 영화 말미에 나타나는, 원래 도쿄만은 바다였었다, 인간이 간척을 하고 기온이 변화면서 도쿄는 땅으로 변화하였을 뿐, 세상은 자연스럽게 물에 잠겼다 되돌아오고 하는 과정을 아주 천천히 반복적으로 지속해나갔으며, 전혀 이상할 거 없다는 할머니의 말씀은 히나를 되돌아오게 만든 영화와 관객들의 결정에 대하여 힘을 실어준다.
즉 이러한 결정은 희생을 만들어 내었던 숭고한 목적에 대해 다시 생각하도록 만든다. 즉 기존의 날씨를 회복하기 위해 히나를 희생하는 행위는 인간들로서는 숭고한 목적으로 보일 수 있으나, 거대한 자연의 흐름 안에서 보았을 때 이는 숭고한 자연의 이치를 거스르는 행위였다는 것이다. 히나와 코타로의 인간의 층위에서 나타나는 목표를 히나의 희생을 취소하는 것으로 더 큰 자연의 층위에 대한 목표로 바꾸어내며 낮은 도덕적 차원의 목표에서 더 숭고한 차원의 목표로 희생의 목표를 바꾸어 이를 이행한 것이다.
이 영화는 희생에 대한 전형적인 플롯은 아닌 것처럼 보일 수도 있으나, 이는 현대에 이르러 희생의 플롯이 어떠한 변화된 양상으로 나타날 수 있는지 보여주는 좋은 작품이라고 생각한다. 이제 관객들은 단순하게 주인공과 그를 둘러싼 인물의 희생으로 직관적으로 보이는 작품의 갈등을 해결하는 것을 선호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분명 이를 불편하게 여기는 이들도 있을 것이기도 하다. 본 영화의 결말에 대해 많은 이야기가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본 영화는 욕망으로 발생하는 갈등, 섬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코타로의 욕망이나, 맑은 하늘을 보고 싶은 사람들의 욕망, 서로를 욕망하는 히나와 코타로의 사랑과 같이 뒤엉킨 욕망에서 발생한 갈등이 고조되고 이를 히나라는 희생물과 맑은 하늘이라는 희생물로 완화해나가는 ‘모방 매커니즘’과 희생의 플롯을 잘 보여주고 있다. 더불어 이러한 욕망과 희생을 통하여 히나와 코타로는 자아 정체성을 찾고 자아를 실현해나가는, 인간다운 모습을 보여준다. 관객들은 히나에 희생에서 비극에 의한 카타르시스를 느낄 수 있지만, 동시에 코타로에 의하여 구해지는 히나의 모습을 보고 또 다른 극적인 즐거움을 느끼고, 더욱 인간과 자연의 입장에 과연 더욱 숭고한 희생의 가치가 무엇이었을지 고민해볼 기회를 얻었을 것으로 보인다.
지금까지 희생에 대한 논의와 이러한 논의를 기반으로 희생의 플롯을 어떻게 바라볼 수 있을지, 그것이 애니메이션 영화 “날씨의 아이(天気の子)”에 적용하였을 때 어떻게 나타나는지 살펴보았다. 희생은 인간의 욕망과 맞물려 인간의 자아실현에 대해 고민하고 가장 인간답게 만들어주는 행위이며, 이러한 행위를 담은 희생의 플롯은 어떻게 보면 가장 인간다운 모습을 보여주는 플롯이다. 그렇기에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지금까지의 여러 작품에서 사랑받는 주제의 플롯이 되지 않았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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