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게 2020년은 보기 드문 긴 해였다
벌써 어느덧 연말. 연말이 되면 늘 ‘벌써’라는 말이 먼저 튀어나오는 것 같다. ‘별로 한 것도 없는데 일 년이 갔다’는 말을 매년 달고 살다가 어느 해부터는 그 말조차 지겹고 진부해진 듯하다. 그래서 급기야는 12월 31일이나 1월 1일이나, 하루 차이인데 그게 그거지 뭐. 뭐 별다를 게 있다고.. 호들갑 떨 필요 있나. 그리하여 보신각 종소리도 잊은 지 오래고 12월 31일에 하는 온갖 시상식 프로그램도 안 본 지 오래다. 카운트 다운도 초침이 가는 것일 뿐 별 의미 없다. 아이를 낳은 후 점점 그렇게 시간에 대해 무뎌져 갔었다. 오늘이 어제 같고 내일도 오늘 같은 날들의 무한 반복.
나에게 유일한 자극이었던 회사생활 마저 그만두고 나니 일상은 더욱 같은 날들의 반복이었을 텐데 이상하게도 그렇지 않았다. 달라진 것이 있다면 그 일상을 대하는 나의 태도였을 뿐이다. 그런데 그 변화가 생각보다 큰 변화를 가져온 것을 새삼 깨닫는다. 오늘은 오늘일 뿐, 지금 여기 있는 나는 ‘다시 반복될 수 없는 나’이고, ‘지금이라는 시간을 인식하자’는 생각이 여러 책을 읽는 동안 내면에 깊이 자리 잡았다. 통 읽지 않았던 책을 다시 집어 들고 꾸역꾸역 읽기 시작해서 일 년 동안 겨우 35권 정도 읽었을 뿐인데도, 일 년에 다섯 손가락만큼도 꼽지 못했던 지난날에 비하면 나는 그만큼 많이 성장한 것 같다.
학교에서 작은 손으로 꼬물꼬물 색종이를 잘라 동그랗게 이어 붙여서 만들어 온 고리가 참 예쁘다 말해주니, 그 뒤로 몇 번을 더 신나게 만들어 온 아이. 그걸 걸어 놓으니 이번 크리스마스트리는 더 애착이 간다. 반짝거리는 트리 옆에 앉아서 지난해를 가만히 돌아다본다. 코로나가 아니었다고 해도 나에게 2020년은 그 이전 10년 동안 생각할 사유를 다 해야 할 멋진(?) 한 해였다. 이혼과 해외 이주로, 준비 없이 던져진 혼자만의 육아는 생각보다 어려웠다. 아이가 태어나기 전부터 맞벌이 부부로 일했던 엄마이기에 아이와 단둘이 보내는 시간은 늘 장밋빛 꿈처럼 그려지곤 했었다. 아이를 위한 예쁜 간식을 만들고, 재미있는 엄마표 놀이도 해주고, 다정하게 장 보러 함께 가고, 놀이터에서 엄마들도 사귀어서 친구들도 많이 만들어 주고 등등. 오래 기다렸던, 드디어 나의 의지대로 키워볼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왔는데, 상황은 그리 녹록지가 않았다.
엄마 이외에 자기를 사랑해줬던 모든 가족들이 한순간에 사라지고, 낯선 곳에 와서 낯선 언어를 배워야 친구를 사귀고 선생님에게 귀여움 받을 수 있는 처지가 되는 것. 아이에게는 청천벽력 같은 일이었을 것이다. 게다가 나도 아이가 어떤 면에서는 참 낯설었다. 혼자 외동아들을 키우며 쉴 시간이 부족한 것도 힘들었지만, 그 보다 더 힘든 것은 모든 요구를 다 들어주는 할머니 밑에서 자란 아이였기에 엄마의 지시나 통제를 무시하거나 거부하는 것이었다. 나는 자타가 공인하는 충분히 수용적인 엄마이지만, 아이가 위험하거나 몸에 해롭거나 예의 바르지 않은 행동에 있어서는 통제를 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육아와 관련된 프로그램이나 책들을 찾아보고 적용해보고 수정하는 작업을 오랫동안 반복해야 했다. 엎친데 겹겹이 겹쳐서 코로나 덕분에 락다운까지 왔었으니, 집에서 하루 종일 시간을 보내야 하는 아이와 나는 서로 정말 힘든 시간이었다. 지금 생각해보니 그래도 잘 견뎌왔고 이전보다 관계가 훨씬 나아졌으니 다행이지만 말이다.
그와 동시에 전남편과의 공조라고 해야 하나. 우리야 어찌 됐든 아이를 잘 키우기 위한 서로의 노력이 나름대로 계속 진행이 되었고, 그 와중에 간혹 의견이 엇갈리는 경우도 생겼다. 남편은 남편대로 자신의 계획과는 달리 코로나 때문에 재미없게 혼자 집에서 지내야 하는 날이 많아지자 우울해졌고, 급기야는 심리상담을 받으며 아이의 상황도 크게 문제 삼았다. 나의 설득 끝에 결국은 좀 더 지켜보기로 했지만, 그때마다 내 에너지는 심하게 고갈되곤 했다. 나는 나대로 육아를 하면서도 학생으로서 수업이나 과제에 시간과 노력을 할애하느라 아슬아슬하게 줄을 타야 했고, 좀 더 현실적으로 경제적 자립을 위한 방법을 계속 모색해야 했다.
그러는 동안 스스로 으쌰 으쌰 응원을 하며 힘을 내어 보기도 하고, 때로는 실망스러운 모습에 의기소침해지기도 했다. 그럴 때마다 나를 다잡아 준 것은 독서와 글쓰기이다. 잠깐 방심하는 사이 일상에 함몰될 뻔하는 순간이 와도 책을 읽고 글을 쓰면 나는 그래도 다시 깨어있을 수 있었다. 브런치에 글을 올리는 것도 새로운 경험이었고 나와 매일 짤막하게 하루를 열거나 마무리하는 일기장도 중요한 역할을 한 것 같아 내년에도 두 가지를 계속 써 볼 생각이다.
그저 어제보다 조금 나은 내가 되자, 행여 어제보다 낫지 못하더라도 자책하는 대신 늘 깨어서 나를 돌아보며 한 걸음씩 더 움직이는 내가 되자. 이것이 나의 지난 일 년의 모토이다. 앞으로 다가오는 한 해도 오늘보다 조금 더 디딛는 작은 발걸음들이 모여서 나를 또 다른 곳으로 이끌 것이라 믿는다. 나의 느린 글쓰기도 부끄럽고 더디지만 꾸준히 하다 보면 어디엔가 다다를 것이라 믿고 있다(맞겠지? :)) . 2019년까지의 10년은 나를 소모하느라 스스로를 잃어버렸던 세월이었다면, 2020년부터의 10년은 나를 지키고 주변을 늘 돌아보는, 내가 봐도 내가 좋은 그런 날들이 될 것이다. 또다른 10년이 흐르는 동안 나의 50대는 어떤 모습이 될지 모르지만, 최소한 40대가 되었을 때의 무지함과 헛헛함은 아니기를 조심스럽게 바라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