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봄날기록 Apr 11. 2021

4월은 가정방문의 달

담임선생님 접대하기




내가 초등학교를 다닌 80년대 후반에서


90년대 초에는 학기 초가 되면


담임선생님의 가정방문이 있었다.



서울에서 초등학교를 다닌 동갑내기 남편은


담임선생님의 가정방문이 없었다고 한다.


신뢰도 제로인 남편 기억력을


믿어야 하나 말아야 하나.



담임선생님은 1년을 함께 할 제자들의 가정환경을


알 수 있는 좋은 제도인 거 같은데


몇몇 학부모들의 자식 욕심에


담임선생님의 가정방문이


합법적인 촌지의 장이 되어


정부에서 금지했는지도 모르겠다.



남편도 시어머니가 돈을 끼워 넣은 책을


담임선생님께 선물로 드리곤 했단다.



내가 살던 깡시골에서도 몇몇 젊은 엄마들은


학교에 촌지를 찔러 넣어 치마바람을 일으켰다.


누구 엄마가 선생님한테 돈을 줬다느니


식사를 대접했다느니


애들끼리도 말이 오고 가곤 했다.




초등학교 시절 매년 4월은 가정방문의 달이었다.


4월은 마을을 둘러싼 야트막한 산에 진달래가 한창이었고,


빈 논은 자운영꽃으로 자줏빛 군락을 이루었고,


봄 햇살에 녹은 땅을 갈아엎는


마을 어르신들의 바지런한 쟁기질로 한 해 벼농사의 시작을 알렸다.



아무리 기억을 떠올려봐도


1학년, 4학년, 5학년 담임선생님의 가정방문 기억밖에 없다.


세 분의 선생님 성함은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




1학년때 담임 선생님은 


마루에 걸터앉아 엄마와 말씀을 나누셨고


나는 수줍어서 방에서 나오지 못하고


선생님의 뒤통수만 훔쳐보면서


연신 흘러내리는 콧물을 소매 깃으로 닦아내고 있었다.


당시는 애들이 그렇게 콧물을 흘리고 다녔다.



내가 그 순간을  또렷이 기억하는 이유는


엄마는 내가 콧물을 닦아내던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저 계집애가 저렇게 소매로 콧물을 닦아서


소매 깃이 반들반들하다며


선생님 앞에서 호들갑스럽게 흉을 보는 게 아닌가.



아마 대화거리가 떨어져 뻘쭘해진 상황에서


얘깃거리를 찾던 중


내 콧물로 반질반질해진 소매 깃이


대화의 소재로 발탁이 된 듯 싶다.



천사 같은 선생님은 별일 아니라는 듯


저 나이 때 아이들이 다 그렇지 않냐며 곱게 응수하셨다.



나는 내 이름 석자를 겨우 적고 입학을 해서


한글을 몰라 1년 내내 나머지 공부를 하느라


얼굴을 가장 많이 본 선생님으로 


제일 애틋하고 감사한 분이다.




4학년 때 담임선생님의 가정방문 추억은


아련하고 따뜻하다.


가정방문이 있던 4월은 따뜻했고


길가와 논두렁에는 쑥이 지천이었고


봄꽃이 여기저기서 피어오르고 있었다.



우리 동네로 가정방문을 오시던 날


나는 윗동네에서 집으로 내려가던 중이었다.


저 멀리서 선생님이 혼자 걸어가고 계셨다.



평상시 나였으면 선생님을 피하기 바빴을 텐데,


그때는 망설이지 않고


선생님께 달려가 저희 집으로 가시냐며


 도란도란 얘기하며 우리 집으로 향했다.



그때 집에 아버지만 계셔서


선생님은 아버지와 단독 면담을 하게 되었는데


성적이 좋지 못한 나를 뭐라도 칭찬해준다며


ㅇㅇ이가 그림을 잘 그린다며 운을 띄우니



아버지는 그림 잘 그려서 어디다 써먹냐며


핀잔 섞인 말로 찬물을 끼얹었지만


속으로는 싫지 않으셨던 거 같다.


내가 어렸을 때 벽이랑 마루에 낙서로 칠갑을 해놨어도


아버지는 혼내지 않으셨고


그림 잘 그린다고 칭찬까지 하셨으니 말이다.



선생님에게는 곤욕이었을 우리집 가정방문이 끝나고


다음 방문할 친구 집까지 안내해드렸다.




5학년 때 담임선생님은 키가 훤칠한 미남이셨다.


사람들이 자신을 노총각으로 본다며


좋아하셨던 유부남 선생님이셨다. 


엄마는 또래 엄마들보다 늙었음에도 불구하고


수줍음과 부끄러움이 많으셨고


특히 남자 선생님 앞에서는 새색시 같이 수줍어하셨다.


이럴 때면 사발에 소주를 가득 따라


떡하니 권하는 두둑한 배포를 가진 다른 엄마들이 부럽기도 했다.


그 시절 엄마는 겉은 투박한 촌부이면서


속은 말랑말랑한 17세 소녀였나 보다.



엄마는 담임선생님이 남자인 것을 알고


콜라 한 잔 대접하라면서 달랑 천 원 한 장 쥐어주고


밭일을 핑계 대며 호미 들고 밭으로 달아나버렸다.



혼자 남은 나는 점빵에서 콜라 한 병을 사 와


냉장고에 넣어 두고 선생님이 오시기만을 초조하게 기다렸다.


이 누추한 집안 꼴을 보일 생각을 하니


가정방문은 나에게도 힘겨운 연중행사였다.



드디어 동네 친구가 선생님을 모시고 우리 집에 들어섰고


집에 나 혼자 있는 것을 아시고 마루에 앉으셔서


말없이 집안을 둘러보셨다.



지난여름 태풍에 날아간 헛간 지붕도 신경 쓰이고


다 쓰러져가는 재래식 화장실도 부끄러웠다.


내 작은 몸이라도 헛간 앞에 버티고 서서


헛간과 화장실을 감추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내 머릿속에는 온통


냉장고에 넣어둔 콜라 생각밖에 없었지만


엄마의 수줍음을 그대로 물려받은 딸이라


선생님께 시원한 콜라 한 잔을 못 내드렸다.



그 날 일기장에 선생님께 콜라를 대접할 생각으로


콜라를 사다 놓고 기다렸는데,


깜빡하고 드리지 못했다고 깜찍한 거짓말을 적었다.



선생님은 어린 동심을 그대로 믿으시고


‘오늘이라도 콜라 먹으러 갈까?’


빙그레 웃으시며 일기장을 건네셨고


나는 또 수줍게 웃을 수밖에 없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