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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봄날기록 May 17. 2021

나의 험난한 한글 깨치기

아련한 한글

 

   한 번 깨치면 몰랐던 때로 돌아가기 힘든 한글. 명석한 두뇌는 하룻밤에도 깨친다는 훌륭한 한글인데 나는 한 번 깨치는데 길고 혹독한 시간을 보냈다. 내 아이는 한글을 깨치고 입학 시키려고 노력했지만 아이는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가' 가르치면 '가' 까먹고 '나' 가르치면 '나' 까먹는 아이는 먹기만 하고 뱉을 줄을 몰랐다. 결국 이름 석 자만 겨우 쓰게 하고 입학 시켰는데 - 그러기도 쉽지 않을 텐데 - 1년 내내 지 이름 석 자만 적었다. 그것도 가끔 순서가 바뀌어서 ㅎㄷ유가 되었다가 ㄷ유ㅎ가 되었다가 이름이 날씨처럼 변화무쌍해서 온전한 이름을 볼 때가 드물었다. 

  1학년 2학기 학부모 상담 때 선생님은 아이가 한글을 몰라도 너무 모른다며 난독증 검사를 받아보라고 조심스레 권했다. 나는 준비한 대답을 거침없이 말했다.  

‘선생님, 저도 한글을 늦게 뗐어요. 1학년 내내 몰랐다가 2학년 올라가면서 자연스레 눈이 떠졌어요. 저희 아이도 그럴 거라고 생각해요.’

선생님은 이 무데뽀 학부모와 말이 안 통한다고 생각했는지 그 후로 한글에 대해서는 일체 말씀을 안 하셨다. 선생님께 큰 소리 떵떵 쳤지만 내 기대와 달리 아이는 2학년을 몇 달 앞두고도 가나다에서 발전이 없었다. 나는 1학년 겨울방학 때 본격적으로 한글을 가르쳤다. 공부방, 학습지 선생님까지 동원했지만 한글 깨치는 길은 앞이 보이지 않았다. 한글을 외부업체에 맡긴다는 게 솔직히 자존심 상해서 잠시 끊고 내가 2주 동안 독하게 가르쳤다. 가르치는 족족 까먹는 아이가 답답해서 책을 몇 번이나 던졌는지 모르겠다. 그렇게 아이는 눈물로 한글을 배웠다. 아이까지 이어진 한글 깨치기 전통은 대를 이은 우리 집 문화유산이 되었다. 이제 나의 혹독한 한글 깨치기 기억 속으로 들어가 보자.


  나는 1987년에 초등학교에 입학했다. 내가 초등학교를 다니던 시절은 그렇게 옛날도 아니었는데 시골이란 특별한 환경 때문인지 대부분의 부모들은 교육열이 낮았다. 당시는 초등학교 입학 전에 한글을 깨우친 아이는 정말 드물었다. 한글을 깨우쳤다는 것만으로도 우등생으로 분류 되던 시절이었다.  입학하자마자 한글을 술술 읽던 몇 몇 친구들은 내 눈에도 대단해 보였다.

  우리 부모님은 여느 부모들과 마찬가지로 밤낮으로 어업과 농사일로 바쁘셨다. 내가 초등학교에 들어갈 나이가 되었는데도 부모님은 나에게 한글을 가르쳐 주지 않았다. 일제 식민 시절에 국민학교를 다닌 아버지는 그 벽촌에서 고등학교까지 나왔고 엄마는 학교 문턱에는 못 가보고 야학교를 3개월 다녔다. 당시는 여자에게 교육은 사치로 여기던 시절이었다. 총명하지 못한 엄마에게 야학교 3개월은 한글을 깨우치기에 역부족이었다. 아버지는 겨우 국민학교만 나온 저학력자들이 대부분인 시골에서 단연 지식인이었다. 동네 사람들은 축의나 조의 봉투에 이름을 적어야 할 때 필체가 좋은 아버지에게 부탁했다. 남에게 살갑게 굴던 아버지는 가족에게 냉혹했다. 아버지는 한글을 잘 못 읽는 엄마를 바보라고 구박했다. 구박할 시간에 한글을 가르쳤으면 깨우치고도 남았겠다. 나도 은연중 늙고 못 배운 엄마를 무시했다. 이제야 한글을 모른 체 저 세상 가신 엄마에게 미안한 마음이 든다. 다섯 자식이 각자 살기 바빠서 어느 자식도 엄마에게 한글을 가르쳐 줄 생각을 못 했다. 나라도 철이 들어 엄마에게 한글을 가르쳐 드렸으면 좋았을 걸 그랬다. 가족들은 내 한글 공부에도 전혀 관심이 없었다. 당시 우리 집에는 동화책이 한 권도 없을 정도로 아이를 위한 집안 환경이 전혀 아니었다. 나는 겨우 내 이름 석 자를 적는 것으로 초등학교 입학 준비를 마쳤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대부분 아이들도 초등학교에 들어와서‘ㄱㄴㄷ’부터 배웠다. 


   나는 총명하지 못한 탓에 한글을 깨치기까지 많은 시간이 걸렸다. 며칠이면 깨우친다는 훌륭한 한글을 1년 내내 배워야 했다. 까막눈 아이들은 수업이 끝난 후 교실에 남아서 한글 공부를 좀 더 하고 가야 했는데 나는 그 불명예스러운 무리에 끼어있었다. 1학기 때는 남아 있는 아이들이 제법 있었는데 2학기 때는 몇 명 남아 있지 않았다. 나는 그때도 탈출을 못 하고 남아서 한글과 눈씨름을 해야 했다. 선생님은 매일 국어 교과서에서 배운 단어를 읽는지 못 읽는지 테스트 하셨다. 선생님은 테스트에 통과한  아이만 집에 보내주었다. 나를 집에 못 가게 붙들었던 단어가 많을 테지만 유독 잊히지 않는 단어가 있다. 

  그날 국어 시간에는 <개미와 베짱이>를 배웠고 나는 으레 방과 후에 남아 오늘 배운 동화를 읽고 또 읽었다. 읽는 건지 외우는 건지 앵무새처럼 수없이 반복했다. 이 정도면 집에 갈 수 있을 거 같아 선생님 자리로 가서 자신 있게 책을 펼쳤다. 선생님은 손가락으로 한 단어를 짚었는데 그 글자가 너무 복잡하고 빼곡했다. 수없이 읽었는데도 어떻게 읽는지 도무지 생각나지 않았다. 선생님 손끝이 향한 글자에 나는 입을 꾹 다물고 애처로운 표정을 지었다. 제 자리로 돌아가야 한다는 건 말하지 않아도 알았다. 자리로 돌아와 ‘뻘뻘’을 노려보며 글자 주위로 원을 마구 그리며 수없이 되뇌었다. 뻘뻘. 그날 오후 개미도 나도 땀을 뻘뻘 쏟았다.

30년 후 개미는 오늘도 뚠뚠 일을 하고 낮에는 동학개미로 밤에는 서학개미로 활약한다. 

 

  교육열이 전혀 없던 부모님은 막내딸이 학교에서 늦게 온 이유를 알면서도 집에 늦게 왔다고 야단치고는 한글을 가르칠 생각은 안 하셨다. 그때 부모들은 아이에게 한글을 가르치는 건 선생의 몫으로 생각하셨다. 아이들이 한글에 눈을 뜰 때까지 인내심 있게 기다려주고 끝까지 함께한 1학년 선생님의 배려 덕분에 까막눈인 내가 한글을 읽고 쓸 줄 알게 되었다. 세월이 많이 흘러 기억 속에서 선생님의 얼굴은 다 지워졌지만 인자한 성품과 우아한 파마머리만 기억이 남아 있다.  

한글을 몰랐던 시절을 한글로 푸는데 왜 이리 아련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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