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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봄날기록 Apr 30. 2023

엎질러진 밥상


  ‘밥하기 싫어 죽겠다’

인터넷 검색창에 거칠게 자판을 두들겼다. 대한민국에 나 같은 주부가 몇 명은 있겠지 기대하며 그 몇 명을 찾아 헤맸다. 대부분 밥하기 싫어 죽겠다고 하면서 성실히 밥을 하며 살아가고 있었다.

안 돼! 당장 밥하기를 멈추고 연대해야 돼!


  언젠가 밥하기 싫어서 죽고 싶다고 했다. ‘헐, 그럼 나가서 돈 벌어오는 나는 뭐냐’ 며 남편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리 말하면 딱히 할 말이 없긴 하다. 언젠가 남편도 가족을 먹여 살리기 위해 지겨운 밥벌이를 계속 해야 한다는 압박에 죽고 싶다고 했었다. 나도 양심이 있는지라 그 말 듣고 너무 미안해서 이혼을 해줘야 하나 고민했다.


 죽을 때까지 밥하기 굴레를 벗어나지 못 한다 생각하니 끔찍하다. 밖에 있다가도 끼니때가 되면 밥을 하러 가야 한다는 생각에 힘이 쭉 빠졌다. 밥하기는 싫어했어도 마트에서 장 보는 것은 좋아했었다. 마트를 돌 때 가장 총기 있고 생기가 넘쳤다. 남편은 그런 나를 보고 눈이 반짝반짝 빛난다고 했다. 마트에서 의욕적으로 식재료를 담던 마음은 집에 오자마자 후회로 변했다. 이제는 어깨춤을 추게 만든 마트 가는 일조차 시들해졌고 마트에 가도 더 이상 눈이 빛나지 않는다.


  아이 먹일 볶음밥을 볶으면서 사람도 나무처럼 땅 밑 영양분을 흡수하고 광합성을 하면서 살아가면 얼마나 좋을까? 허튼 망상까지 해본다. 하루 세 끼는 아니더라도 최소 두 끼는 해야 하는데 매일 똑같은 시간에 똑같은 재료로 매번 다른 결과물을 내놓아야 하는 건 엄청난 스트레스다. 청소나 빨래는 창의적으로 할 필요도 없고 매번 다른 결과물을 내놓을 필요도 없다. 남편은 두 끼 연달아 똑같은 반찬을 밥상에 올리면 물린다고 안 먹으니 어쩌란 말이냐? 난 9년째 입맛을 잃고 몇 주째 김장김치에 밥을 먹고 있다.

 

  밥하기는 식단 짜기, 장보기, 식재료 다듬기, 정작 요리하는 시간은 간단하고 설거지까지 딸려온다. 설거지거리의 자가 번식력은 최고다. 한 끼 해먹는데도 그릇은 왜 그리 많이 나오는지 그릇 어딘가에 암수 생식기가 있어 그곳에 닿을 때마다 새로운 생명이 쌓이는 게 분명하다. 밥하기 싫은 핑계가 고구마줄기처럼 끝도 없이 나온다.  사람은 위장이 있는 동물이라 안 먹고 살 수는 없으니깐 어쨌거나 죽을 때까지 처절하게 밥을 하자. 농담반 진담반으로 내 묘비명도 지어봤다.

'밥 짓기에서 해방되다'


  신혼 초 시어머니는 아침저녁으로 전화를 해서 남편 밥은 뭐 해서 먹였냐? 밥 잘 차려주라고 신신당부했다. 이럴 거면 평생 옆에 끼고 따뜻한 엄마 밥을 손수 먹일 일이다. 이제야 알았다.  매일 밥 짓는 일이 지겨워 아들 밥상 차리는 일을 슬그머니 며느리에게 바통을 넘겨준 것이다. 넘겨받은 밥통에 매일같이 밥을 해대는데도 인정도 못 받고 어쩌다 한 끼 안 하면 죄인 취급이다.

 

 결혼 전에는 퇴근 후 저녁밥을 밖에서 해결했기 때문에 내가 밥 짓기를 이렇게까지 싫어하는 줄 몰랐다. 맞벌이 시절 퇴근하고 집에 돌아오면 남편과 아이는 먹이를 기다리는 아기 새처럼 입을 쩍쩍 벌렸다. 그 모습에 다리 힘이 풀렸고 밖에서 오래달리기 하고 또 100미터 달리기를 하는 기분이었다. 서둘러 팔을 걷어붙이고 굶주린 아기 새들 입에 따뜻한 먹이를 넣어줘야겠다고 서두르기보다 무거운 어깨짐에 행동이 굼뜨곤 했다. 가정이 화목하려면 낮에는 밥짓기, 밤에는 짝짓기를 잘해야 한다는데......

둘 다 못해도 굴러는 갑니다. 

 

  밥하기가 끔찍하게 싫은 근원적인 이유를 찾아보자. 어릴 적 엄마가 잠깐잠깐 집을 나가서 어린 내가 밥을 해서 아버지 밥상을 차려드려야 했다. 어릴 때부터 나에게 밥하기는 간헐적 의무였고 생존의 투쟁이었다. 거의 매일 동네 부끄럽게 싸우는 부모님을 보면서 한 분이 돌아가셔야 지긋지긋한 일일연속극이 끝날 거 같아서 아무나 돌아가시기를 빌었는데 엉뚱하게 엄마가 먼저 저 세상으로 가셨다. 아차! 바닷가에서 소원을 빌 때는 구체적으로 빌어야 한다는 것을 뒤늦게 깨달았다. 나는 죗값으로 고등학교 3년 내내 주말마다 버스로 3시간 걸리는 집으로 내려가 거동이 불편한 아버지의 일주일 생존 양식을 만들어야 했다. 토요일 오후 집에 가기 싫어 꾸물거리면 오빠는 방문을 발로 차며 재촉했다. 해가 빨리 떨어지는 겨울에는 가로등 하나 없는 어두운 시골길은 화성에서 일어난 연쇄살인사건을 떠올리게 해서 극한의 공포였다. 나는 세상에서 차가운 어둠이 가장 무섭다. 차가운 불을 밝히고 나만 기다리고 있던 아버지. 엄마가 밥상을 내어 갈 땐 밥 때 조금만 늦어도 마당에 밥상을 엎어버리던 아버지가 딸이 억지춘향으로 차리는 밥상은 고분고분 잘 받아 드셨다. 한 번쯤 아버지가 밥상을 엎길 바랬었다.


  졸업 후 띄엄띄엄 집에 내려갔다. 2주에 한 번, 한 달에 한 번 간격이 점점 길어졌다. 하필 5남매 중 가장 책임감 없는 막내딸에게 구걸하며 밥상을 받을 줄은 생각도 못 하셨던 아버지는 독하게 곡기를 끊었다. 마지막 밥상으로 무얼 드셨는지 어느 자식도 궁금해 하지 않았다. 아버지 살아생전 죽음을 입에 담는 모진 말도 했었다. 멀리 타지에 나가 있던 언니들은 죄책감에서 벗어나 있었다.  집에 가장 보탬이 안 됐던 K장녀는 어떻게 그런 말을 하냐며 나를 섬뜩해했다. 엄마 돌아가신 후 아버지에게 밥상 한 번 안 차려준 큰언니가 할 말은 아닌 거 같다만 정황상 아버지의 밥상을 엎은 건 나였다. 


  온갖 매체에서 '집밥은 엄마의 사랑' 이라는 모성애 프레임을 씌운다. 대한민국 엄마로 태어난 이상 이번 생애는 나 죽었다하고 처절하게 밥을 해야 하는데 한 번씩 찾아오는 지독한 밥하기 싫어증은 적응도 안 되고 극복도 안 된다. 울 엄마는 새까만 아침에 굴 까러 갔다가 해거름에 돌아와 밥을 짓는 기분이 어땠을까? 겨울 내내 시래깃국만 끓여댔으니 뭐 딱히 어려울 것이 없었나? 그때는 하루 세 끼를 시래깃국에 김장김치만 먹어도 먹을 때마다 맛있었다. 내 평생의 식욕을 시래깃국에 쏟아부었나보다. 꿈에서라도 엄마를 만난다면 밥 하느라 고생 많았다고 시원한 물메기탕을 끓인 밥상을 차려 주고 싶다. 

  

  아내 없으면 라면 하나도 못 끓여먹는 남편을 둔 게 자랑인양 말하는 중년 여성들이 의외로 많다. 그런 남자 트럭채 줘봐라, 트럭 팔아서 삼성전자 주식 사지. 한 지인은 밖에서 일하다가도 점심때가 되면 집에 가서 남편 밥상을 차려준다며 대단한 내조를 하는 양 으스댔다. ‘그것도 자랑이라고’ 나는 속으로 비웃었다. 그런데 이 부부가 싸움을 하게 되면 남편의 고정 레퍼토리는,

“당신이 집에서 하는 게 뭐가 있어!”

1년 365일 앉아서 밥상을 받는데도 저런 소리가 아무렇지 않게 나온다. 


제발, 누가 내 밥 좀 해 주라. 

밥때 조금만 늦으면 밥상을 엎어버리던 아버지처럼 나도 밥상을 엎어버리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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