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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봄날기록 May 24. 2024

언니 전문대 나왔죠?



"언니 전문대 나왔죠?"


별안간 싸대기를 맞은 것처럼 얼얼했다.

나는 그녀에게 학벌 커밍아웃을 한 적이 없는데

자격증 얘기를 하면서 뜬금없이 물었다.

정신이 아득한 상황 속에서도

"아니, 나 방송대로 업그레이드 했는데..."

웃으며 얼버무렸지만

그 말을 들은 순간 마음이 구겨지고

무슨 말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고

일그러진 마음이 얼굴에 베어나오지 않도록 안간힘을 썼다.

내 안에 학벌 컴플렉스가 엄청나다는 걸 깨달았다.


안국역에 있던 여고를 나온 지인은 

안국역을 지날 때마다 모교 출신 연예인을 

줄줄이 나열해서 나도 외울 정도가 되었다.

지인은 성적이 안 됐는데도 불구하고

아버지의 소원을 들어드리기 위해 

이화여대에서 학력고사를 봤다고 했다. 

'우리 딸 이대 가는구나.'

정문 밖에서 자신을 기다리던 아버지가 

그렇게 기뻐하던 모습은 

그때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며

큰 불효를 한 것처럼 죄스러워했다. 

나는 울 아버지가 중학교만 졸업시키고 옆 동네 마흔살 노총각한테

시집 안 보낸 것만 해도 감사하게 생각한다며 농담했는데,

"그래, 시골에 계신 울 고모부가 여자들이 배워서 뭐하냐고 

학교를 안 보내서 자식들이 다 중졸이야."

웃자고 한 소리인데 속으로 당황했다. 

2024년 아직 중졸 개그 할 시대가 아니란 걸 알았다. 

울 엄마는 1930년대에 태어나 국민학교에 들어가보지도 못하고 

그렇게 하고 싶던 이혼도 못 해보고 까막눈인 채로 눈을 감았다. 

고등학교가 학력의 끝인 줄 알았던 척박했던 집구석에서

여기까지 뚫고 나온 것도 대단한 거라며 스스로 토닥여본다.


다른 집처럼 대학은 당연한 노선처럼 지원해줬다면

우리집 자식들도 대졸자들이 속출했을 것이다.  

바로 위에 언니는 시골 중학교지만 전교 1등도 했었다.

한 선생님이 딱한 사정을 알고 언니를 고성읍 서점으로 데리고 가

전 과목 참고서를 사주었지만 

언니는 정해진 진로를 거스를 역량이 부족했다. 

아버지의 형편 없는 교육열과 지독한 가난 때문에

언니는 서울에 있는 야간 상업계고등학교에 가야했다.

방배동에 있는 방직공장에서 3교대로 일하고

밤에는 학교에 다녔다.


그런 상황 속에서도 전문대까지 나왔지만

전문대는 명함도 못 내미는 강남 한복판에 살아서

좋은 대학 나온 강남 엄마들 사이에서

가난해서 대학을 못 갔다며 고졸 행세를 하고 다닌다.

언니는 동네 놀이터에서 이대 나온 여자를 알게 되었는데

그 집 부모는 딸을 서울대를 목표로 뒷바라지 해줬는데

이대에 갔다고 상심이 컸다고 했다. 

이쪽은 이쪽대로 저쪽은 저쪽대로 리그가 있었다.


다행히 나는 공고를 나와 돈을 벌던

7살 위 오빠가 학비를 뒷받침 해줘서

주간 상업계고등학교를 나올 수 있었다.

난 여기서 내 인생이 정해지는 줄 알았다.

중소 회사에 들어가 경리로 일하겠구나 했다.


고등학교 1학년 어느날,

장래희망란에 '중소기업 경리' 라고 적어냈다.

담임 선생님이 종례시간에 무거운 얼굴로

"졸업하면 너희들 원하는 거 다 될 수 있어.

이게 끝이라고 생각하지마.

상업계를 나왔다고 경리만 하는 게 아니라고."

나는 담임선생님의 안타까운 울부짓음에도

왜 저렇게 오바를 하나 싶었다.


학교에서 강제 취업 시켜 준 직장에서 졸업식때까지 버티다가 때려치웠다.

한 순간에 족쇄가 풀린 탈소속감은 생각만큼 통쾌하지 않았다.

내 인생 2막은 서울에서 쓰고 싶었다.

먼저 서울에 자리를 잡은 언니를 비빌 언덕으로 삼고 무작정 서울로 갔다.

직장을 구해 몇 년 동안 모은 돈으로 전문대 야간에 입학했다.

벅찬 환경에서도 장학금을 놓치지 않을 만큼만 공부했다.

졸업만을 목표로 들어간 방송대에서도 장학금을 놓치지 않을 만큼만 공부했다.

방송대 졸업장을 받고서 우리 집안에서 가방 끈이 제일 긴 여자가 되었다.


몇 년 전, 앞집 202호 아주머니와 차를 마시다가

자기 남편은 똑똑해서 대학원까지 나왔고

시누들은 전문대 밖에 못 갔다면서

굳이 머리가 안 좋다는 말까지 덧붙였다.

전문대 동문 친구에게 이 얘기를 했더니

'저도 전문대 나왔어요.' 라고 얘기하지 그랬냐며

어깨에 앉은 깃털처럼 가볍게 얘기했다.

"너 같으면 그 말 하겠냐?"

전문대 이하는 머리 나쁜 여자로 보는 202호에게 물어볼 걸 그랬다.

'어느 대학 나오셨는데요?' 


주민센타 강좌에 가보면 어르신들 대부분

본인 학벌 자랑, 아들 서울대 나온 거 자랑,

아들 전문직 자랑, 자랑 자랑 자랑 끝이 없다.

그 중에서도 학벌 자랑은 너무나 소중해서

치매에 걸려서 자기 이름은 까먹어도

'우리 아들 서울대' 나온 건 안 까먹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언니 전문대 나왔죠?' 상처가 아물기도 전에

피딱지를 내 손으로 잡아뜯는 일이 있었다.

작년에 여성인력개발센터에서 취업 교육을 들었는데

어쩌다 얌전한 언니와 짝꿍이 되었다.

이해가 빠릿빠릿하고 작업하는 게 남다르다 했는데

교육 수료하고 한참 뒤에 이화여대 출신이라는 걸 알았다.

그걸 알고 며칠 동안, 나만 혼자 괴로워했다.

지금은 이대 출신도 극복하고 연락도 하고 가끔 만난다.


방송통신대학으로 레벨업 해서 가방끈은 늘렸지만

시작이 전문대라 이 학력 컴플렉스가 사라질지 의문이다.

내가 대학원에 간다고 해서 이 학력 컴플렉스가 극복이 될까?

살면서 얼마나 많은 학력컴플렉스 돌부리에 부딪칠까?

순간 발가락이 얼얼하겠지만 더 튼튼한 안전화를 신고 걸어 나가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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