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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키친테이블 Nov 17. 2019

이즈 백은 없다, 진로와 보름달

기억 하나, 두꺼비와 가출

 마셨던 첫 번째 기억

1997년 9월.



우리는 딱히 할 일이 없었다. 고입을 100일 앞둔 날이었다. 그렇다고 치열하게 공부해보자, 뭐 이런 생각은  들지 않았다.

미애와 진이는 이미 실업계 고등학교에 원서 접수를 마치고 합격을 한 상황이었고, 고입연합고사는  내게만 남은 숙제 같은 거였다. 나도 실업계  고등학교에 원서를 넣었다가 리라의 만류로 취소했던 사건이 있기도 했다. 수업 시간이면 선생들은 모두 고등학교 재수는 쪽팔리지 않느냐고 겁을 줬다. 그래도 리라와 나는 수업 시간이면 교환 노트를 주고받았고,  쉬는 시간이면 매점으로 뛰어가 벽돌 모양의 옥수수 식빵의 크림을 탐닉했고, 덜 익힌 오뚜기 육개장을 흡입했다. 교실은 넓었고, 나를 가려주는 아이들의 머리는 무수했으며, 나는 세상의 중심이면서 뽀시라기이기도 했다.

가끔씩은 도시락도 꺼내 먹었다. 수업 시간에 먹는 도시락만큼 맛있는 건 없었기 때문이었다. 내 도시락에는 김치볶음은 빠지지 않았으므로 점심시간용이었고 수업시간용은 진이의 도시락이었다. 진이가 싸오는 동그랑땡은 큼직해서 한 입에 넣기 좋았고 무엇보다도 식은 전은 냄새를 풍기지 않아서 좋았다.


미애의 집은 방과 후 우리의 아지트였다. 미애는 언제나 그렇듯이 우리와 무슨 대화를 하든 맥주병으로 다리를 문질렀고 양팔을 벌려 겨드랑이 밑살을 털어내는 동작을 하기 바빴다. 그 날은 빙초 시술이 있던 날이었다. 미애의 얼굴에는 이미 전 날의 시술 흔적이 남아 어떤 건 붉은 채로, 어떤 건 갈색의 딱지로 남아 있었다. 진이는 미애에게 눈밑이라는 예민한 부위의 점을 맡겼다. 그때 난 미애를 향한 진이의 우정의 깊이를 알 수 있었다. 그건 감히 내가 끼어들기는 어려운, 그런 믿음이었다고 기억한다. 미애가  내 얼굴의 점도 빼주겠다고 덤볐만 진이의 점 밑에 면봉 끝이 닿았을 때의 칙, 하고 잇이로 침을 뱉는 듯한 소리와  빙초산의 독한 냄새에 섞인 머리카락이 타는 냄새가 허락은커녕 자리를 박차고 나가고 싶은 충동들었다. 내 얼굴은 깨밭이었고, 진이의 시술에 성공한 미애가 지르는 환호성에 두려움까지 배가 되었다.

그 시기 우리의 우정이란 건 모두 한 몸과 한 뜻을 이루어 하나로 향하는 테스트의 연속이었기 때문에 미애의 제안을 거절하는 데에는 그 이상의 명분 없이는 각오가 필요한 일이었다. 그때, 내가 미애의 시술을 거절한 말은 100일이었다. 그 날 고입 시험 100일 전이라는 거 말고는 아무 핑계도 떠오르지 않았다. 아이디어란 남아있지 않은 몹쓸 머리통이었다.

 "그러니까 그게 왜, 100일 전인 거랑 점을 못 빼겠다는 거랑 무슨 상관인데?"

 "어, 머리카락이랑 손톱, 발톱, 이런 거 자르시험에서 떨어진다고 그러더라. 그런데 점이라니. 내 몸에 그렇게 꼭 붙어있는 걸 억지로 떼어낸다는 게 좀 그래. 100일이라는 이 시기를 봤을 땐 더더."

다급한 마음 때문인지 말을 하다 보니, 말이 저절로 만들어지고 있었다. 면봉을 든 미애의 팔이 무릎으로 내려왔다.

 "아, 그러고 보니까 나도 그런 소리 많이 들었어. 그러니까 징크스, 뭐 그런 거지? 나 아는 언니는 백일 전에 백일주 마셔서 합격했다고 그런 것도 있다고 그러더라."

리라 겁이났겠지? 리라가 나를 거들었다.

"하긴 너네는 아직 시험 남았으니까 점을 뺀다는 건 그런 기분이 들 거 같아. 께름칙하지. 붙어야지 그걸 뗀다는 게, 그치?"

미애가 말했다.

"너구리 라면을 끓여먹고, 우유에 콘프라이크를 말아먹고 이런 걸 모두 같이 먹으면서 말이야. 왜 우리가 그 생각은 못했지? 백일주말이야. 오늘이 지나갔다면 나, 너무 미안할 뻔했어. 오늘 우리 백일주 그거  먹자."

 진이가 진심으로 미안해 했고, 나는 진이의 진심에 새삼 감동했다. 우리는 근린공원에서 다시 만날 것을 약속했다.  각각 맡은 바를 정했다. 소주 한 병과 안주 하나. 대담한 준비물이었다. 열여섯 첫술에 소주 한 병이라니.


나는 계란과 파, 맛소금을 사면서 자연스럽게 소주 한 병을 집어 들었다.  진로 소주였다. 어떤 술이냐가 중요한 것은 아니었다. 우리가 백일주를 마시며 이 날을 기념한다는 게 중요한 사실이었다. 란과 파, 맛소금은 엄마 심부름으로 보이기 위한 위장술이었다. 그래서 계란과 파는 안주로 변신하지 못했고 나는 냉장고를 뒤적거리다가 져갈 것은 치볶음밖에 없다는 사실만 확인했다. 돈도 없고 안주도 없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드는 미안한 마음은 갖지 않으려고 했다.


토요일 저녁의 근린공원은 적지 않은 사람들로 곳곳을 채우고 있었다. 달리기를 하는 가족, 줄넘기를 하는 가족, 연인들과 불꽃놀이를 하는 아이들까지. 렇지만 상관없었다. 우리 중학교 뒷벽을 마주한 공원의 자리는 볼품없이 솟은 경사의 언덕이었고, 가로등불조차 잘 닿지 않아 우리가 자리잡기에는 적당했다. 리라의 검은 봉지에서 진로 한 병과 전기구이오징어가 나왔다. 미애의 베네통 힙색에서도 진로 한 병과 약과 네 개가 나왔다. 미애 다음에 내가 봉지를 열 게 되면서 미안함은 완전히 사라졌다는 걸 알았다. 진이는 아디다스 책가방을 메고 왔고, 거기서 진로 두 병과 동그랑땡이 나왔을 때, 다 같이 웃음을 터뜨렸다.

보름달이 우리 잔디 밭 위로 흘러왔다. 김치볶음, 동그랑땡, 약과와 전기구이 오징어. 익숙하고 여전한 것들 사이에서  달빛을 받은 진로 소주병은 그때까지 한 번도 가보지 않은 이국의 바다 색깔같은 낯섦과 설렘을 품고 있었다.  

"합격을 위하여!"

종이컵에 따라진 첫잔에서 풍기는 과학실 냄새를 맡으며 우리는 동시에 들이켰다. 한 손에는 소주잔을 한 손에는 친구의 손을 잡은 채로.


독하고 강렬한 첫모금이 식도를 타고, 위를 통과하고 아랫배까지 전율하게 했다. 맛이 없는 건 분명했지만 이토록 기막힌 자극을 몸의 내부로부터 불러 일으킬 수 있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롤러코스터나 후롬라이드가 주는 자극과는 다른, 내 몸 안에서 꿈틀대며 퍼지는 그 뜨끈하면서도 따가운 감각이 혈관을 통해 퍼진다는 걸 느낄 수 있다니. 알코올은 분명 피를 타고 흘렀고 나는 뜨거워졌고, 그 얼마간의 뜨거움이 식은 전을 데우면서 되살아나는 풍미처럼 내 속에 것들을 마구 일으켜세운다는 것도 알았다.


"너무해. 사는 게 뭐 이렇게 너무 한 거 뿐이냐?"

내 속엣것이 따갑고 뜨거워져서 막 터져나가려고 할 때, 진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난 언니처럼 실업계에 가기는 싫어. 그렇다고 연합고사를 보는 것도 싫어. 인문계랑 실업계랑 벌써부터 나누고 헤어지라는 것도 싷어. 엄마가 빈대떡을 파는 것도 싫어. 아빠가 없는 것도 싫고 내가 아직 열여섯밖에 안 되서 아무 것도 할 수 있는 게 없다는 사실도 싫어."

진이는 싫은 것투성이의 삶을 뱉어냈다. 나는 진이가 아빠가 없는 것도, 진이의 그 맛있는 동그랑땡이 진이가 싫어하는 삶에서 나온다는 것도 그때서야 알아버렸다. 그리고 내가 공감도 위로도 할 수 없다는 걸 알았다.

"난 내가 남자친구가 없다는 것도 싫고, 입을 옷이 없다는 것도 싫어. 그리고 별로 먹은 것도 없는데 튼튼해지는 이 저주 받은 하체가 싫고. 무엇보다도 내 아이큐가 두 자리수라는 게 참을 수 없이 싫어."

미애가 고해성사를 마치고 갑자기 울음을 터뜨렸다. 미애가 우는 이유가 두 자리 아이큐 때문인지, 살 때문인지, 남친 때문인지, 입을 옷이 없기 때문인지 알 수 없었지만 미애의 눈물이 그 고백과 상관없다는 것만은 확신했다. 미애같이 잘 웃지도 않고 웃겨주지도 않고 매사가 하드코어한 기지배의 눈물이 소주만큼이나 강렬했다. 리라는 아무 말 없이 훌쩍이고 있었다.

나는 무엇을 고백해야할까. 내가 감추고 있던 것들은 이미  알코올에 깊이 절여져 숨을 죽이고 있었다. 나는 계속해서 술을 마셨다. 내가 좋아하는 진이의 동그랑땡도 먹을 수가 없어서 조각 낸 약과를 입에 넣고 소주를 마셨다. 보름달이 우리를 떠나지 않고 비추고 있었고, 이따금 불어오는 바람을 느낄 때면 입을 크게 벌리고 하악하악 빨아들렸다. 제 정신이 아니었고 제 정신이고 싶지 않았던 밤이었다.

" 지랄같다."

내가 뱉은 처음이자 마지막 말이었다. 그리고는 기억을 잃었다. 잠깐잠깐 엘리베이터가 흔들렸고, 걸레를 들고 설치는 리라 얼굴과, 뽀글거리는 아줌마의 뒤통수가 띄엄띄엄 조각난 기억으로 남았을 뿐이었다. 내가 눈을 떴을 때는 고입 디데이 99일이었고, 리라의 방 안이었다. 우리 집이 어디인지도 모르고 전화번호도 모르고, 술 취한 나를 어디로 데러가야할지도 모르는 사실에, 우리가 서로 모르는 것만을 공유했다는 것을 알았다고 한다. 나도 리라의 방은 처음이었고 가출도 처음이었다. 나는 집으로 기어들어갔고, 때마침 내려준 비 덕분에 내 모습은 더욱 애잔했으며 엄마는 도끼빗을 한 번 들었다가 현관 앞에서 무릎으로 주저 앉은 나를 그저 외면하고 말뿐이었다.


진이랑 미애는 아마도, 내가 리라와 지금까지 싫은 것을 공유하며 소주를 나누는 것처럼 지내고 있을 거란 생각이 든다. 진이 말대로 실업계와 인문계가 우리를 가른 것이었을까? 우리는 졸업을 했고 새로운 학교에서 뽀시라기가 되지 않기 위해 애썼고 그러면서 이전의 시간과 멀어지면서 그것을 잇지 못했던 것은 분명했다. 서로를 서운하게 했던 것도 없었는데, 97년 유난히 추웠던 그 겨울의 졸업식이 영영 마지막이 될 거란 것은 몰랐다.

크라운 뚜껑의 톱니바퀴를 두른 25도씨의 진로 소주, 우리는 근린 공원에서 4병을 먹었고 마지막 5병은 손을 씻고 입을 헹구고 머리에 뿌렸다고 했다. 진로는 이즈 백해서 돌아왔지만 그날 보름달빛을 안주 삼아 하악거렸던 공기와 온도를 돌이켜주지는 못한다.


그날의 소주는 그 날이면 사라진다. 관계도 알코올과 같다. 계속 부어주지 않으면 혈중에 떠도는 알콜은 사라지게 되어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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