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키친테이블 Nov 26. 2019

 연애 없는 연애

기억 둘, 소야와 레몬소주

술을 마셨던 두 번째 기억

1997년 12월.




 두 번째 기억은 같은 해, 12월, 한 해가 거의 끝나갈 무렵의 일이다. 자친구가 생겼다. 매일이 처음 주어지는 새 것의 하루이지만,  난 남자친구가 있다는 것만으로 몹시도, 굉장히, 무척, 아주, 새로운 하루를 보낼 수 있었다. 그 때는 모쏠이라는 말은 없었지만, 어쨌든 모쏠 탈출을 해준 남친이었으므로 한 페이지에 기록해도 괜찮다는 생각이다.

 미애와 진이, 리라는 나보다 먼저 남자 친구가 있었다. 언젠가 미애네 집에서 뒹굴거리다가 나도 모르게 깜박 잠이 들었던 적이 있었는데 그 잠깐의 공백동안 내가 공유할 수 없 이야기들을 주고 받았다는 걸 알았다. 내가 얼핏 잠에서 깨면서 들은 첫키스와 그 다음 키스와 또 그냥 키스와 또 다른 키스의 이야기들. 그 키스키스한 이야기들을 듣지 못했다고 아쉬워하는 나에게, 리라가 나는 알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알아서는 안 되는 이야기라 대화를 마무리했다. 그런 법이 어딨냐, 우기면서 장난을 치거나 화내지 못했다. 언젠가 하게 될 그 키스 이야기가 뭐라고 나를 따돌리냐고 따지지 못했다. 나는 그들에게서 '넌 끝내 이게 뭔지 모를 거야'라는 우월감,  무자격의 나를 허용하지 않는  커다란 벽을 느꼈다.


 열여섯, 연합고사가 끝난 겨울이 주는 느낌은 무모한 다정함이었다. 세상에 두려울 것은 하나도 없었으며, 추위도 빙판길마저도 다정했다. 입시가 끝나고 느끼는 그 홀가분함은 세상의 모든 무게를 느끼지 못하는 무중력의 나로 만들었다. 나는 맨몸으로 여기저기를 부유했고 어딘가에 부딪혔으나 아픔도 충격도 느끼지 못한 채, 그 만큼의 힘으로 멀어져 또다시 여기 저기를 부유했을 뿐이었다.


일찌감치 알바를 시작한 진이가 맥도날드 크루의 소개로 다리를 놓았고, 우리는 진이의 주선으로 버스로 30분 거리의 학교 아이들과 미팅을 했다. 친구들은 모두 내 핑계를 대며 미팅에 나갔다. 남친이 있으면서도 말이다. 나는 롯데리아에서 남과 여로 나누어 앉아 미팅을 하는 그 상황을 견디지 못해서 자꾸 말이 많아졌고, 주책 아닌 주책이 이어졌으며, 떨어지는 양상추를 턱으로 낚아채며 한입에 털어넣는 기이한 개인기까지 하는 주접녀가 되어 있었다. 실제로는 데리버거 소스의 맛도 못 느꼈으면서 말이다.

"망했다."

미팅에서의 성공을 간절히 바랐나보다.  나도 모르게 뱉어 버린 말에서 내 바람이 무엇이었는지 확인했고 이미 늦었다는 결론도 동시에 확인했다. 오똑한 코에  긴 다리의 성숙한 몸을 가진 미애는 우리 중학교로 전학 온 첫날부터 인기녀 등극이었고, 진이는 SES의 슈를 닮아서 또 인기가 많다고 스스로 밝혀주었고, 리라는 늘 그 과묵하고 차가운 느낌이 호기심을 불러일으켜 우리가 넷이서 어딘가를 누빌 때면, 약간의 주목을 받을 수 있었다. 그 와중에 나는 자연스럽게 분위기메이커 역할을 도맡았다. 남 좋은 역할이 내 담당이 되다니. 마지막까지 솔로로 남은  건 난데, 친구들은 나를 위해 나왔다면서 온갖 이 표정과 이쁜 말들과 이쁜 먹방만 펼치고 있었다. 결국 제 욕심을 따라 가는 것이겠지. 

"데리버거 맛 없어? 그럼 아이스크림 먹을래? 추운 날 먹는 아이스크림이 더 맛있어."

까만 코트를 입 남자애 냅킨을 건네며 말했다. 내 턱에 묻은 소스까지 보았다는 사실에 한번 더 절망하며 그걸 받았다.

"그러니까 아이스크림을 먹으러 둘이 가겠다는 거야? 다 같이 나가겠다는 거야?"

이런 걸  확실하게 짚어 물어주는 진이한테 약간의 고마움을 느꼈다. 착각이든 아니든 빨리 확인하는 게 낫다는 생각이었다.

"내가 그 말을 너한테 하지도 않았는데 네가 그걸 왜 묻는 거야?"

다른 상황이었다면  왕싸가지라고 욕했을 그 애의 말이 싫지 않았다. 그 말이 내 남친이 되기 위한 필요충분 조건은 될 수 없었지만, P는 내 남친이 되었다. (몇 번의 수술을 하면서 머리가 돌이 되었음에도 까먹지 않는 첫 남친, PYY)


음성 메시지를 삐삐 사서함에 남기고, '팡코'나 '샤갈의 눈내리는 마을' 쇼파에 앉아 전화 통화를 하고. 우리의 연애는 그게 전부였다. 쓰고 보면 별 거 없는 행위들이었다. 그러나 전화기의 번호를 누를 때면 호들갑을 떨다 잠잠해졌던 내 친구들의 모습을 보며 느낀 그 말간 우정과, 신호음 하나에 떨렸던 투명했던 내 심장 박동수가 초록 트리의 빨간 리본같은 기억으로 만들었다.


저녁 밥을 먹지 않고 나가겠다는 내게 억지로 숟가락을 쥐어주고 내밀었던 엄마의 단팥죽, 입가에 묻히지 않고 조심히 먹으려다가 앞섶에 흘린 단팥죽 때문에 내 첫 데이트는 크리스마스 이브가 아닌 동짓날이었다고 정확히 기억한다.

대학가 신발가게에서 고른 싸구려 롱부츠를 맨다리에 신고 리라에게 빌린 미니스커트를 입었다. 그리고 지하철을 타고 7호선 어느 낯선 역, P의 동네에 갔고 P를 따라 바이킹 호프집에 갔다. 강북의 날라리가 아닌 건 분명한데, 그 시절의 그 공기는 모든 걸 허용한 것 또한  분명하다.

배의 내부 같기도 외부 같기도 한 호프집이었는데 커피숍과 다를 없이 테이블을 둘러싼 안락한 공간에 안심했다.

소시지 야채볶음을 '소야'로 주문한 P의 모습이 멋있었다. 소야와 함께 주문한 레몬 소주는 맛있었다. 상큼하고 달달한 주스 맛 뒤에 따라오는 어울리지 않는 알코올의 쓴 맛이 소시지 하나, 양파 하나면 상쇄되었다. 두꺼비 소주처럼 내 말초 감각을 기름통에 넣고 튀기는 그런 쾌감은 없었다. 그러나 달콤한 감각으로 은근하게 띄어올렸고 괜한 용기도 생겼다.

"넌 나랑 왜 사귀는 거야?"

입 밖의 물음에는 입 안의 이런 감정들을 담고 있었던 거였다. 넌 내가 왜 좋아? 나의 어떤 점이 너한테 예뻐 보였어?

P는 망설이지 않고 곧장 대답했다.

"착해서."

 그 말에 난 조금 화가 났다. 아니, 이 세상 모든 착함에 화가 났다. 나빠지고 싶었다. 내가 나빠지고 나면 넌 어떻게 할 건데? 차 버릴거냐? 내가 듣고 싶었던 대답을 따로 정해 놓은 것도 아니었는데, P의 대답이 싫었다.


P와 지하철 역까지 걸었다. 역이 다와갈 즈음, P는 내 볼을 잡았당겼다. 우리의 첫 스킨십이었다. P를 통해 키스대화자격증을 얻으려던 건 아니었다. 그렇지만 흔해 빠지고 매력도 없는 두부 덩어리가 된 기분이 들었을 때 무자격의 나를 인정하는 일이 더 의미있겠다는 확신을 했다.

P가 데려다주겠다면 지하철을 같이 탔다. 지하철 차창에 비치는 P와 내가 보였다. P는 P자신을 보고 있었고, 나는 그런 P를 보았다. P는 머리카락을 만지다가 허리를 숙여 바짓단을 당겼다.

"먼지 터는 거야?"

"아니, 바지에 무릎나오는 거 정말 싫거든."

"그런 게 싫을 수 있구나."

그런 게 싫을 수 있는 P에 대해 생각했다. 그런 게 싫을 수도 있지, 그래서 착한 게 좋을 수도 있는 건가? 정말 유치한 발상이었지만.

내가 내려야할 역에 도착했고, P는 거기에서 다시 돌아가기로 했다. 지하철 밖의 나와 지하철 안의 P가 인사를 주고 받았다.

"잘 가."

적당한 인사였다. 지하철 문이 닫혔다. 유리창을 사이에 두고 나는 손을 들어 작게 인사했다. 고개를 숙인 P의 모습은 사라졌다. 그 때 역무원 아저씨의목소리가 쩌렁하게 울렸다.

지하철 문이 다시 열리며 내는 소리를 들었다.

-머쓱.

바지 무릎의 구겨진 천을 펼치던 P가 보였다. P가 고개를 쳐들고 나를 보았다. 지하철 문이 '머쓱'하고 다시 닫힐 때까지 우리는 눈을 맞췄다.


 뒤늦게 올라온 취기에 눈동자가 뜨거워지는 것인지 내 눈알이 빨개지고 있다는 게 느껴졌다. 역에서 5분도 안되는 집까지 나는 휘청거렸다. 아침에 눈을 떴을 때, 실핏줄 터진 눈동자와 송곳으로 솜을 채운 베개를 반나절은 베고 있어야 했다.


며칠 후, 나는 P의 음성사서함에 메시지를 남겼다.

"난 착하지 않아. 나는 어렸을 때부터 그 말이 싫었어."

내가 싫은 게 네가 나를 사귀는 이유가 된다는 건 말이 되지 않았다. 착하다는 말은 내게 꿰어차놓은 굴레가 되었고, 또 착하다는 걸로 내 모든 행동과 결과가 설명되고 특히, 관계가 설명되는 건 더 싫었다. 무릎 나온 바지를 싫어하니까, P라면 나를 이해할까? P에게 이해를 바랐다면 할 수 없는 말이었을 거다.

연예 없는 연예는 그렇게 끝이 났다.

 나는 다른 사람의 생각따위는 관심 없었고 내가 설명하지 않은, 때로는 나도 설명할 수 없는 감정을 이해받기 바라는 커다란 욕심으로 관계를 만들려고 했다. 그렇게 맺고 싶어하는 관계는 레몬소주 같은 거였다. 

소주면서 레몬인척 하는 것. 달콤한 감각으로 내 자신의 감정이 전부인 듯이 속이며 설명을 하지도 들으려고도 하지 않는 기만, 뒤늦게 따라오는 일방적인 취기 같은 거라고.


 거 봐. 두 가지가 어떻게 하나가 될 수 있겠어?

결국 술이거든? 괜찮아, 괜찮아 하다가 술이었지롱 하는, 기만함. 레몬이든, 자몽이든, 오이든, 매실이든, 깔라만시든. 그건 그냥 기만함이야.


매거진의 이전글 이즈 백은 없다, 진로와 보름달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