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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키친테이블 Dec 09. 2019

초행자의 산냄새

네 번째 기억, 청국장과 막걸리

네 번째 기억,

2019년 12월.


겨울잠을 잤다. 토요일과 일요일, 가끔 휴무가 있는 날이면 어김없이.

영화도 보러 가고 싶고, 쇼핑도 하고 싶고, 친구를 만나 좀 특별한 음식도 먹고 싶은데 이번 겨울의 명령같은 겨울잠은 거부할 수 없었다.

주중에 잠을 충분히 못자는 이유도 있고, 머릿속이 종일 쉬지 못하는 이유도 있다.

소설책을 출간하기로 하면서 계약서를 쓴 가을의 그 시점부터 시작된 불면증이었다. 계약서를 쓰고 나오면서부터 다음 작품에 대한 생각으로 머릿속이 무거웠다. 생각의 구속은 '생각'에는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는데, 끊어내지지 않았다. 머릿속이 무거워지니 두통이 피로감이 되어 손가락 끝까지 무겁게 짓눌러서 한 줄도 적지 못했고, 무기력했다.


계속 잠을 잤다. 오후 세시무렵 살짝 눈이 떠졌고 이 기운을 지금 떨치지 못한다면 내일 오후 세시까지 잔다고 한들 이길 수 없는 피로가 될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가장 따뜻한 옷을 입고 뒷산 산책길로 향했다. 10년 전 쯤 입었던 모직 바지를 장농 속에서 찾았고, 늘 신던 운동화와 롱패딩 차림으로 산을 올랐다. 산에 오르면 머리가 맑아지고 몸이 가벼워질 거라 기대하면서 말이다. 산에는 이미 알록달록한 옷을 입은 부지런한 등산객들이 하산을 하는 시이었다. 산을 내려오는 등산객들은 내 차림에 시선을 주었다. 어제 눈이 내렸기 때문에 내리막 길과 그늘에는 녹지 않은 눈이 위험하게 서려 있었다.


산을 오르기 전의 기대감 대신 한 가지 사실을 발견했다.

산은 초행자에게는 단 한가지만 보여준다. 내가 딛어야할 단 한 걸음의 시야. 딱 그것만 허락했다. 나무 뿌리와 돌멩이들, 나무와 나무 사이의 발을 딛을 240사이즈의 공간. 나는 내가 그 다음에 내딛을 한 걸음을 쫓기도 바빠 설경을 보는 것도, 산이 내뿜는 맑은 공기를 마시는 것도 잊었다. 내 턱밑의 숨을 고르느라, 한 걸음을 내딛느라 바빴다. 나는 초행자였기 때문이다.

초행자, '어떤 곳에 처음 가는 사람'이란 뜻이었다. 산도 소설도 같았다. 숨막히게 보이는 한 문장과 한 단어들에 갇혀 버렸다는 걸 알았다.

나는 애써 눈을 들었다. 돌산에 서리처럼 앉은 흰눈이, 아래로는 주택의 지붕들이 보였다. 깊게 숨을 들이마시자 겨울의 찬 공기에서 청국장 냄새가 났다. 겨울산의 냄새가 청국장냄새 같다는 발견. 곧 나는 내가 산에 온 목적을 발견했다.

이게 산냄새라면 나는 방향을 잃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기사식당이 많은 버스 종점이 있는 산동네 마을으로 방향을 다시 잡았다. 목적지는 정해졌다. 목적지로 향한 길이 제대로 나 있지 않아서 한 걸음에 더 집중해야 했다. 가끔씩 나뭇가지가 내 롱패딩 아래로 손을 넣어 걸음을 붙잡기도 했고, 눈이 녹은 곳의 진흙은 모직바지에 엉겨붙기 쉬웠다.


오후 네시반, 막걸리를 마시기 좋은 시각이다. 청국장과 제육볶음, 막걸리 한 병을 주문했다. 천천히 나올거란 걸 알아서 막걸리만이라도 먼저 내달라고 할까하다가 말아버렸다.

오뎅 볶음, 애호박나물, 시금치, 그리고 나박하게 썬 총각김치. 뚝배기에서 보글거리는 걸쭉한 청국장냄새가 좋았다. 가게 안은 문 앞에 놓인 가스난로로 데워지지 않아 많이 추웠다. 아주머니는 가게 밖으로 나가 검정 봉지 안에서 장수 막걸리 한 봉지를 꺼내며 흙인지 뭔지 모를 것을 손으로 닦아냈다. 막걸리 유통기한은 꼭 확인하고 마시는데, 만든지 열흘을 꽉 채운 바깥의 공기 그대로의 애매한 막걸리였다. 다른 건 달랠가 하다가 말아버렸다.


45도 쯤 병을 기울여 뚜껑을 반쯤 열었다. 기포들이 힘차게 올라오며 자연스럽게 뒤섞일 기울기와 숨구멍이었다. 그런데 탄산이 올라오다가 다시 가라앉았다. 몽글몽글한 효모덩어리들이 무겁게 가라앉았다. 막걸리도 내 상태랑 비슷했다. 기운차게 올라오며 기포들과 섞이며 탁해질 막걸리를 맛보기는 어려웠다. 나는 다시 뚜껑을 닫고 소주를 흔들 때보다는 약하게 병을 두어번 뉘었다가 세웠다가를 반복했다. 그렇게 심폐소생술하며 억지로 섞고 한 잔 따르고보니, 유통기한이 지난 막걸이였다. 주인 아주머니께 이야기하려다가 말았다. 

 탁주를 사발에 따라 청국장과 함께 먹었다. 역시 총각김치는 막걸리와 좋은 궁합의 기본 안주이다. 시원한 짠 맛과 시원한 단 맛의 조화가 밥을 부른다. 밥 한 공기를 싹 비우고, 남은 막걸리는 총각김치와 생마늘을 안주로 다 마셨다. 신선한 막걸리가 아니어도 괜찮았다.


산을 오르며 가벼워질 거라고, 심기일전할 수 있을 거라는 처음의 기대감도 잊어버렸다. 그리고 막걸리의 휘적거림으로 내 생각들도 휘적휘적거린다.


아무렴 어때.

나는 초행자다. 그렇게 생각했다. 어느 걸음이든 한 발자국만 더 생각하는 사람. 그러다가 문득 그런 생각이 들면 산에서 맡지 않아도 맡을 수 있는 청국장 냄새를 기억해내는 사람. 목적이  무엇이었는지, 방향이  어디었는지, 아무렴 어때.


겨우내 나는 소설은 쓰지 못할 거 같다는 생각을 했다가  다시  산에 오른다면  그때는  두걸음쯤  여유있게  오를 수 있는  보폭을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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