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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키친테이블 Mar 03. 2020

 규칙적인 유일함

다섯번째 기억, 미화된 규칙


나는 규칙적인 일에 약하다.  다행스럽게도, 내 주변에 많은 사람들이 규칙에 약하고, 동질감으로 서로를 위로한다.


그런 와중에 내가 유일하게 규칙적으로, 꾸준히 하고 있는 것이 바로 술 마시는 일이다.

커피와 술.

내가 애정하는 음료.

둘 중에 한 가지를 골라야하는 상황이라면?

이런 가정을 하며 스스로에게 질문하고 매번 내가 선택한 그것에 무한한 가치를 부여하고 있는 나.

그래서

술!

커피를 포기할 수는 있다. 다른 대체 음료로 한번씩 갈증을 속일 수도 있을 것 같다.

그런데 술은 술이 아니면 대체불가이다.

알콜은 알콜이지 알콜이 아닌것이 알콜인척 할 수는 없지 않은가.


나는 규칙적으로 술을 마신다.

기력이 탈탈 털리고 늦게 퇴근하는 날이면 집에서 맥주를 딸 생각만으로도 에너지가 돈다.

집까지 도착할 에너지, 얼른 샤워를 마치고

짱구나 사발면 하나를 뜯고 맥주 캔뚜껑을 들어올리게 하는 기운.

술이 아니면 할 수 없는 일이다.

휴일 아침 느즈막이 일어나 동네 콩나물국밥집에 갈때도,

뚝배기에 계란을 깬 후, 바로 그 타이밍에는 모주 한 잔이 규칙적으로 들이켜진다.

여름 캠핑, 일박 후 맞이하는 아침엔 규칙적으로 아메가 아닌 아맥을 마신다.


한 때 나는 내가 알콜중독자가 아닌가

나를 의심했다. 한 잔을 마셔도 괴로웠다. 어쩌려고 제어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른 것이냐?나를 괴롭히고 못 살게 굴었다. 다른 사람과의 술자리에서도 알콜에 나를 맡기지 않으려 부단히 애썼다.

그러다가 문득,

깨달았다.


난 규칙적으로 마시고 있 뿐이란 걸.

알콜에 나를 맡기고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알콜을 규칙적인  상황에 맞게 꾸준히 이용한 것이라고.

제어할 수 없는 지경이 아니라

제어된 내 생활의 하나의 규칙, 유일한 규칙이라고.


궤변을 늘어놓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어떤 것을 중심에 놓고 사고하느냐의 차이다.

알콜이 중심이었던 적 단 한번도 없다.

단지 내 생활의 규칙적인 일부.

그래서

두 캔을 남겨두는 여유 있다.

중독자라면 할 수 없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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