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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키친테이블 Mar 16. 2020

돌아와서 따르는

여섯 번째 기억, 핑크빛 막걸리 한 잔


3월의 바람은 살랑살랑 봄기운으로 옷장 속을 다 뒤집어놓더니 다시 겨울인 듯 매섭고 차갑게 불어닥친다. 3월의 바람은 늘 그랬다. 맞이할 때마다 새삼스럽는 사실이, 얼마나 한정되고 유한한 기억으로 하루를 보내는지 알게 한다.


백 년이 넘은 옛날 집, 가장 작은 방안에 가족들이 모였다. 아궁이에 불을 지폈다. 기는 손을 내밀게 하는 힘을 지녔다. 아궁이 불로 사람들이 모인다.

큰 삼촌네, 작은삼촌, 큰 이모, 작은 이모, 순천 이모네, 별내 이모, 손주네, 손녀딸


열세 명의 사람들이 아궁이 불로 모였다. 가장 작은 방, 우리 할머니가 누워 계시는 방으로.

아궁이 같은 할머니 곁으로.


할머니가 아프시다. 한 달 반 전에 뵈었을 때와 너무 달라서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다. 그때 할머니는 큰딸 집에 머물다 할머니 댁으로 돌아가서는, 파마도 해달라 하고 몸무게도 재보고 어묵이 먹고 싶다고도 했단다. 지금 할머니는 입으로 내는 소리 대신, 나를 보고 고개만 끄덕 끄덕였다. 공을 가르며 손을 내젓기도 하고, 인상을 찌푸리고 나쁜 꿈을 계속 꾸고 있는 것 같다.


할머니 곁에 이모가 밤을 보냈고, 나는 바로 옆 방에서 밤을 보냈다. 할머니의 신음 소리를 밤새 들으며 몇 번은 벌떡 일어나 방문 앞까지 갔다가 돌아왔다. 무서웠다.

할머니는 매일 이렇게 무서운 밤을 보내고 계신 까.

 

어떻게 맨몸으로 그 고통을 견디라고 하는 거야. 체념도 뭣도 아닌 그 사무적인 말투로, 길어야 한두 달이라고 말하며 처방전도 없이 돌려보낸 의사한테 소리치고 싶었지만.

나는 할머니 대신 병원에 가서 고통을 덜어드리는 약을 처방해달라고 요구했다. 그러기까지 여러 장의 서류를 작성해야 했고.

하나를 말하면 하나만 주기에 여러 고통을 열거하여 다섯 알이 든 약봉지와 모르핀의 100배쯤 된다는 패치를 받아왔다. 그게 겨우 내가 할 수 있는 일이었다.

말기암 환자에게 할 수 있는 겨우의 방법.

몸에 마약 패치를 붙여 드리고 물에 약을  드시게 하고, 입안을 닦아드리고, 기저귀를 갈았다. 여린 불빛의 스탠드를 사고, 분홍색 원피스 잠옷도 샀다. 부드럽고 둥근 할머니의 이마를 나는 감히 여러 번 만진다. 내가 태어날 때부터 할머니인 우리 할머니를, 여러 번 오랫동안 만지고 있는다.

 그렇게 할머니와 3일을 지냈다. 그동안 여러 감정들이 겹겹이 마구마구 멋대로 쌓여버렸다.


집에 돌아왔다.

우리 집 꼬맹이가 내게 묻는다.

-왕할머니 돌아가시는 거야?

나는 그대로 꼭 껴안아주고 욕실로 들어가 샤워를 한다. 씻고 나니 허기가 몰려온다.


막걸리 한 잔을 따랐다.

돌아와서 따르는 핑크빛 막걸리 한 잔.

-엄마, 근데 돌아가시는 게 어디를 가는 거야? 갑자기 사람이 어디로 사라진다는 뜻이야? 그게 죽는 거야?

-같이 있는데 그 몸이 어디로 가? 천국?

꼬맹이는 계속 묻는다.

-돌아가시는 게 천국에 가는 거야? 천국에 왜 가는 거지? 어딜 가면 뭘 하는 거잖아. 거기서 청국장을 먹어?

나는 꼬맹이의 말에 웃었다. 처음부터 꼬맹이는 들리는 대로 '청국'이라고 말하고 있었다. '청국'은 '청국장'을 먹기 위해 돌아가는 곳이라니.

조금 더 큰 꼬맹이가 말을 한다.

-그런 게 난 다 지어낸 이야기 같아. 천국도 그렇고 죽으면 동물로 태어난다는 이야기도 그렇고. 다 지어낸 이야기 같아. 그리고 죽으면 동물이 되면, 가족들도 다 못 알아보는데...

큰 꼬맹이는 거기서부터 눈물이 난다.

-그렇게 동물로 태어나기 싫어. 가족들이랑 헤어져도 헤어졌다는 것도 모르고, 못 알아보고 그런 거...

계속 운다. 나는 말한다.

-엄마는 말이야. 큰 꼬맹이 말도 작은 꼬맹이 말도 다 맞다고 생각해. 방금까지 같이 숨을 쉬고 눈을 맞추고 따뜻하게 손 잡았던 사람이 어디를 갔을까. 왜 사라졌다고 할까. 나는 이렇게 기억하는데.

그래서 사람들은 자신이 믿을 수 있는 마음을 믿어. 우린 그 마음을 믿으면 돼. 그거밖에는 할 수가 없으니 그 믿음에 마음을 걸어.

어떤 사람은 동물로 다시 태어난다고 했고, 어떤 사람은 청국에서 청국장을 먹는다고 했고, 또 엄마는 말이야. 할머니가 믿는 믿음대로 천국에 간다고 생각하고.

-엄마는 할머니가 천국을 믿는 것처럼 정말로 할머니가 천국에 간다고 믿어. 그래서 할머니가  할머니의 엄마를 만났으면 좋겠거든. 할머니의 큰 아들도 만났으면 좋겠거든. 그렇게 먼저 보내고 가슴에 묻었을, 열일곱 살의 아들을 만났으면 좋겠거든. 그리고 엄마의 엄마가 나중에 천국에서 다시 할머니를 만나고, 또 엄마도 엄마를 만나고. 거기선 기다리면 언젠가는 꼭 만날 수 있잖아. 그래서 천국을 믿어, 엄마는.

나는 자꾸 눈물이 나려는 걸 참고 말한다.

큰 꼬맹이는 다시 말한다.

-엄마, 난 그 말도 다 못 믿겠어. 그냥 꿈을 꾸는 거잖아. 그런 거 아냐? 나는 꿈에서 인형 뽑기를 하면 잘 안 보여서 자꾸 놓쳐. 잘 보려고 눈을 뜨려고 해도 눈이 안 떠져. 깊은 잠을 자면 그런 거잖아. 그러니까 너무 깊이 잠들어서 눈이 안 떠지 거고.

나는 큰 꼬맹이를 꼭 껴안는다.

-그렇다면 말이야. 꼭 좋은 꿈을 꾸면 좋겠어.

그 사이 작은 꼬맹이는 내 핸드폰을 들고 가 미스터 트롯의 '막걸리 한 잔'을 다.

-엄마, 울지 말라고 내가 노래 틀었어.

나는 마시고 있던 막걸리 잔을 들고 웃는다.


산수유 열매는 붉은빛이다. 산수유 열매의 붉음이 쌀로 빚은 술과 만나 핑크빛을 만들었다.

핑크빛 인생은 아니었지만.

산수유 열매처럼 붉게 아궁이처럼 따뜻하게 지펴냈던 그 무엇을, 삶과 같이 빚어낸 그 무엇을 생각한다.

나는 그 무엇을 감히 할머니라고 말할 수 없다.

내가 뭘 안다고 그렇게 한 문장을 쉽게 쓸 수 있을까 , 난 애초부터 그런 자격을 갖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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