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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키친테이블 Nov 05. 2020

당신을 보내는 전날 밤

예감보다 예정이 중요했던 순간들에 대하여


이 사진은 당신을 보내는 전날 밤의 사진입니다.

나는 예정된 만남을 치르기 위해 술을 시켰습니다. 평소 좋아하던 안주지만 여러 개를 한번에 시켰고요. 이런 것들이 이 세상을 살아가기 위해서 꼭 필요한 절차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친구의 생일을 챙겨주는 일이니까요. 어떤 날은 친구의 생일을, 어떤 날은 조카의 생일을, 어떤 날은 직장 상사의 빙모상을 챙기고, 어떤 날은 부장의 맏이가 치르는 임용고사를 챙기면서 말이에요. 예정된 것들을 챙기는 일이지요. 좋은 인간이 되는 법 중의 하나 같기도 하고요. 직장 후배가 힘들다고 말할 때 토닥이며 밥이라도 사주는 선배가 되어주는 것도 그 중 하나고요.


예정된 일을 치르며 사는 것도 힘든데, 예감이라니.

저는 그 예감을 잘 못느끼는 감각기관을 지녔고, 예감 따위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생각을 했었던 것 같습니다. 다시 말하지만 예정된 것을 모두 하기도 힘든 일상에 예감은 번외라는 생각으로 애써 감각하지 않았지요.


당신을 보내기 전날 밤,  우리가 좋아하는 여러가지 음식을 시켰는데 이상하게  맛있지가 않았습니다. 맥주를 마시는 내내 배에서 가스가 차오르는 것처럼 팽팽하고 불편했습니다.


나는 친구에게 할아버지의 기일 이야기를 했습니다. 할아버지의 기일을 나는 잊지 못한다고. 할아버지와 추억은 한두 가지밖에 기억에 나지 않는데, 할아버지 기일은 잊을 수 없다고. 왜냐하면 나는 그 한두가지밖에 없는 추억탓일지, 아무것도 예감하지 못한 채 또한 예정된 일을 치르느라 정신이 없었으니까요. 제 생일이었습니다. 친구들과 만나서 술을 마시고 노래방을 갔습니다. 쥬라기 노래방, 노래방 이름도 잊지 못해요. 단골이었거든요. 아마도 '깊은 밤의 서정곡'이나 'love designer' 이런 류의 노래를 부르며 춤을 췄을지도 모르겠어요. 그러다가 할아버지가 그 날의 새벽에 돌아가셨다는 이야기를 들게 되었습니다. 술이 채 깨기도 전인 새벽에 말이에요. 12시가 넘었으니 다음날이었지만 그것은 물리적인 분절의 시각이었을 뿐, 한한시의 감각같은거였을텐데 저는 할아버지가 돌아가시는 날에 예감 따위는 없었어요.

그날,  친한 친구의 생일날 나는 할아버지의 기일 이야기를 하면서 불안했던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잊지 못하는 할아버지의 기일처럼, 또 다시 봄이 왔다고.


친구랑 있는 동안에는 당신에 대한 어떤 소식도 들려오지 않았지만 나는 술과 안주를 남기고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집에 돌아오고 30분도 지나지 않았을 때, 당신이 우리 곁을 떠날지도 모른다는 전화를 받았습니다.


그 때 나는 4일 전, 당신과 함께 거닐던 산책길을 떠올렸습니다. 그게 마지막이었다니. 그 산책길에서조차 나는 아픈 당신과의 마지막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하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그 이야기를 듣고 당신과 걸었던 그 길의 여정을, 당신은 예감하고 있었다는 마음이 들었고요.


휠체어를 태워 대청 마루 아래 마당으로 힘겹게 내려오던 순간, 철렁거리던 심장만큼이나 그 기억의 당신이 선명해요. 살짝 올라간 바지 아래로 드러난 당신의 발목을 감싸려고 자주빛 코트를 무릎에 올려놓고 덮어야했죠. 걷지 못할 걸음이지만 그 발 위에 얹은 털신, 그리고 예쁜 털모자. 꽃 코사지가 드리워진 모자였어요. 당신은 외출하기 전에 매무새도 단장했어요. 그날 사진을 찍어두길 참 잘했어요. 저는 매번 사진을 찍어주는 사람이었던지라 당신과 함께 한 사진은 제 한 손으로 담은 나와 당신의 두 손. 그게 전부였고요.


 우리는 참 여러곳에서 멈추어 섰습니다.

대문 앞, 청보리밭 앞에서 섰습니다. 출렁거리는 청보리밭을 보면서 바람의 방향을 알 수 있었습니다.

길가의 흰 꽃 앞에도 섰습니다. 꽃의 이름이 무엇일까 궁금해 하는 내게 당신은 있는 힘껏 '백약'이라고 말하고는 미소지었습니다. 뒤이어 "그것도 몰라"라는 당신의 웃음에 걸맞는 농담도 함께요.

갈림길에서 당신의 손끝을 따라 윗길로 향는 길을  걸었습니다. 그때부터는 왜 멈추어야 하는지도 모르고 멈추었어요. 당신의 순간이 그곳에  다 담겨있었나요. 그때는 그것도 몰랐어요.

그곳에 당신의 젊음과 당신의 시절과, 그 골목을 뛰노는 아이와, 그 골목에서 서성이던 기다림이 담겨있다는 것도요.


당신을 보내고 한참동안 나는 단골 맥주집에 가지 않았어요.

그곳에서 예정된 생일을 맞이한 내 친구는, 내가 당신을 보내고 왔을 때에도 나를 위로해주지 않아서 마음이 많이 서운했어요. 아마도 그 친구는 그 친구의 예정된 일상 때문에 나의 감정을 헤아리기에는 많이 버거웠을테지요.


나는 당신이 한 말을 떠올렸어요.

오늘을 살아,

당신은 내게 그 말을 종종 건넸지요.

내일 말고, 오늘을 살라고.

나는 당신의 그 말대로 잘 되지 않을 때마다 그래서 마음이 여러번 허물어져서 아플 때마다 잊고 있다가 당신의 그 말을 생각해요.

내일을 위해서도 아니고

예정된 그 무엇을 해내기 위해서도 아닌

오늘을 살겠다고.

오늘의 행복, 오늘의 슬픔, 오늘의 그리움, 오늘의 아픔만큼만.


예정보다 예감을 믿고 살 수 없는 어른이지만

한번씩 나의 예감대로 예정에 어긋난 오늘에 맡기며

그렇게 마음껏 오늘을 살겠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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