춥다. 12월 들어 뚝 떨어진 기온에 코로나 19의 여파로 마음까지 춥다. 이제 곧 크리스마스인데, 연말인데 친구들을 만나기는커녕 근사한 레스토랑에서 외식 한 번 하기 어렵다. 그대로 흘려보내기엔 너무 아쉽지 않은가. 하지만 위기는 곧 찬스. 지금이 가족 간의 애정을 더욱 돈독히 할 좋은 기회일 수 있다. 조촐한 파티라도 하며 얼어붙은 몸과 마음을 녹여 보자. 그런데 메뉴는 뭐가 좋을까? 매일 먹는 치킨이나 피자 같은 배달음식은 너무 심심하다. 그렇다고 제대로 차리자니 번거로울 것 같아 걱정이다. 이럴 때 분위기를 한껏 끌어올릴 수 있으면서도 비교적 손쉽게 준비할 수 있는 메뉴가 있다. 이 메뉴들은 유럽에서, 혹은 호주에서 이맘때쯤 자주 먹는 음식들이니 해외여행을 하지 못하는 아쉬움도 조금은 달랠 수 있을 것이다. 또 하나 중요한 포인트. 술안주로도 안성맞춤이라는 점이다. 특히 와인과는 아주 잘 어울린다. 그럼 뭐, 고민할 필요 없지 않은가. 당장 눈앞에 다가온 연말 홈파티를 위해 준비해 보자.
알프스 샤브샤브, 치즈 퐁듀 혹은 라끌렛 그릴
치즈 퐁듀와 샤브샤브는 별 연관성이 없어 보인다고? 맞다. 재료부터 맛까지 차이가 크다. 하지만 준비한 재료를 육수, 혹은 치즈에 간편히 담갔다가 바로 먹는다는 점, 그리고 추운 날씨에 몸을 따뜻하게 해 주는 음식이라는 점은 유사하다. 무엇보다 따뜻한 냄비에 둘러앉아 함께 먹는 오붓한 분위기가 닮았다
치즈 퐁듀는 알프스 산간지역 사람들이 굳은 치즈를 녹여 딱딱한 빵을 찍어먹던 데서 유래했다. 요즘은 빵뿐만 아니라 햄이나 고기, 야채, 과일 등도 찍어먹는다. 주로 사용하는 치즈는 ‘톰과 제리 치즈’로 유명한 에멘탈, 그리고 구수한 맛이 일품인 그뤼에르 등이다. 국내에서 비교적 쉽게 구할 수 있는 치즈들이다. 퐁듀라는 이름이 프랑스어로 ‘녹이다'라는 뜻의 '퐁드르(fondre)'에서 유래한 만큼 잘 녹는 치즈라면 좋아하는 치즈를 사용하면 된다. 인당 150-200g 정도의 치즈를 잘게 썰어 퐁듀 전용 팟에 넣고 약불로 가열해 녹이면 준비 끝. 화이트 와인을 넣고 함께 끓이면 풍미가 더욱 좋아진다. 퐁듀 전용 팟이 없다고 걱정할 필요 없다. 뚝배기나 일반 냄비를 사용해도 괜찮으니까. 빵과 채소, 햄 등 찍어먹을 재료만 적당한 크기로 썰어 준비하면 된다.
라끌렛 그릴은 쉽게 말하면 퐁듀의 구이 버전이다. 2단으로 된 전기 그릴의 위쪽에는 각종 햄과 채소, 버섯 등 원하는 재료를 굽고 아래쪽에는 라끌렛 치즈를 녹인다. 일단 불판 위에서 재료들이 지글지글 구워지는 모습부터 입맛을 돋운다. 구운 재료들을 개인 접시에 옮겨 적당히 녹은 라끌렛 치즈를 올리면 그야말로 비주얼 깡패. 맛은 말할 필요가 없다. 삼겹살이나 쇠고기 구이에 익숙한 우리에겐 퐁듀보다 라끌렛 그릴이 더 나을지도 모르겠다. 요즘은 인터넷을 검색하면 라끌렛 전기 그릴도 쉽게 구할 수 있으니까.
치즈 퐁듀나 라끌렛 그릴과 곁들이기 좋은 와인은 상큼한 신맛이 매력적인 화이트 와인이다. 리슬링(Riesling), 피노 그리(Pinot Gris) 혹은 피노 그리지오(Pinot Grigio), 소비뇽 블랑(Sauvignon Blanc), 슈냉 블랑(Chenin Blanc) 등을 강력 추천한다. 준비한 화이트 와인 일부는 퐁듀용 치즈에 넣어 끓여도 좋다. 코르크를 연 김에 한 잔 마시며 요리를 준비하는 것도 흥겨울 것이다. 샴페인(Champaign)이나 카바(Cava), 프로세코(Prosecco) 같은 스파클링 와인도 잘 어울린다. 치즈와 궁합도 좋고 입 안도 깔끔하게 정리해 줄 것이다. 레드 와인을 원한다면 피노 누아(Pinot Noir), 보졸레(Beaujolais), 발폴리첼라(Valpolicella) 같은 가벼운 스타일이 적당하다.
진하고 부드러운 호주 와인, 그리고 소화 잘 되는 고기
이번에는 와인 먼저다. 지금 지구 반대쪽인 남반구는 한창 더운 여름이다. 남반구의 진하고 묵직하면서도 부드러운 와인으로 따뜻한 기운을 조금 빌려오는 것은 어떨까. 특히 호주 대표 품종인 쉬라즈는 겨울의 추위를 녹이기 딱 좋은 품종이다. 풍만한 바디에 부드러운 질감, 검붉은 베리 풍미, 톡 쏘는 후추와 싱그러운 허브 향, 초콜릿의 감미로운 여운까지. 따뜻하고 포근한 스타일이다. 마트나 백화점에 가면 2만 원 전후 일상 와인부터 10만 원 이상 프리미엄 와인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가격대의 훌륭한 쉬라즈를 쉽게 만날 수 있다.
그렇다면 함께 먹을 음식은 무엇이 좋을까. 호주에서는 크리스마스에 바비큐를 많이 먹는다. 큼지막한 돼지 등갈비에 소스를 듬뿍 발라 구운 바비큐 립은 호주 쉬라즈와 궁합이 잘 맞는다. 물론 호주는 여름이니 실외에서 바비큐를 즐기겠지만, 실내에서도 충분히 분위기를 낼 수 있다. 번거롭지 않을까 걱정할 필요는 없다. 바비큐 립도 밀키트로 나오는 세상이니까. 오븐이나 프라이팬에 굽기만 하면 패밀리 레스토랑의 바비큐를 우리집 식탁에서 즐길 수 있다. 소스를 빼고 한국식으로 좀 더 담백하게 즐길 수도 있다. 정육점에서 등갈비를 사서 가볍게 삶은 후, 소금 후추로 간을 해서 오븐이나 에어 프라이어에 구우면 된다. 역시 호주 쉬라즈와는 찰떡궁합. ‘만화 고기’ 같은 등갈비를 뜯으며 풍요로운 크리스마스, 행복한 연말을 보낼 수 있다.
바비큐 립으로 이미 배가 가득 찼겠지만, 그래도 디저트는 먹어야 한다. 원래 디저트 배는 따로니까. 내킨 김에 디저트도 고기로 가자. 응? 디저트인데 무슨 고기냐고? 호주에서 크리스마스 디저트로 즐기는 것이 바로 미트 파이다. 영국에서 즐겨 먹는 민스파이(Mince Pie)의 영향을 받았다. 다진 고기와 야채를 버무려 속을 채우고 파이 크러스트를 덮어 구워낸 것이다. 다양한 고기를 사용할 수 있지만 주로 쇠고기를 쓴다. 미트 파이를 삼겹살을 먹은 후 누룽지나 소면으로 입가심을 하듯 식사의 마무리로 즐기려면 마시던 쉬라즈를 곁들여도 좋다. 제대로 디저트로 즐기고 싶다면 에이지드 토니 포트(aged Tawny Port), 달콤한 셰리(Sherry)나 마데이라(Madeira) 등 주정강화 와인과 함께 마셔 보자. 아, 이왕이면 호주산 에이지드 토니와 함께 마시면 더욱 좋겠다. 농밀한 과일 풍미와 어우러지는 단맛으로 기분 좋은 마무리가 될 것이다. 살찔 걱정일랑 잠시 접어 두자. 올해 찐 살은 새해에 빼면 되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