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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와인 만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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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개인 척한 고냥이 Aug 24. 2023

와인을 맛본다는 것, 혹은 즐긴다는 것

'난 치즈랑 와인이 잘 어울린다는 말에 동의할 수 없어.' 언젠가 지인에게 들은 얘기다. 솔직히 좀 놀랐다. 치즈와 와인은 유명한 클래식 페어링 아닌가. 물론 모든 와인이 모든 치즈와 어울리는 것은 아니겠지만 샴페인과 브리 치즈, 피노 누아와 그뤼에르 치즈 혹은 꽁테 치즈처럼 일반적으로 잘 어울린다고 인정하는 조합이 있다. 사실 꼭 이렇게 따지지 않더라도 와인을 잘 모르는 사람조차 와인 안주라고 하면 치즈를 떠올리는 경우가 많지 않은가. 그런데 와인과 치즈가 어울리지 않는다니. 게다가 그 지인은 사뭇 진지했다. 개인 취향 문제가 아니라 정말 치즈는 와인과 어울리지 않는다고 확신하고 있었는데, 그 이유는 바로 치즈가 와인의 풍미를 가린다는 것이었다. 특히 숙성 치즈는 진한 맛과 꼬릿한 향이 와인의 섬세한 풍미들을 다 덮어버려서 와인을 제대로 느끼기 어렵기 때문에 더욱 문제라고 했다. 그래서 고급 와인을 마실 때는 반드시 치즈를 피한다고 한다. 옳고 그름을 따지는 자리도 아니었고 무슨 말인지도 납득이 갔기에 그 자리에서는 그냥 고개를 끄덕였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안타깝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잠시 다른 얘기를 해 보자. 야구를 제대로 보려면 야구장에 가야 할까? 그렇지 않다. 최소한 경기의 세부 내용까지 정확히 이해하려면 집에서 TV로 보는 것이 낫다. 예컨대 관중석에 앉아서는 TV로 보는 것처럼 투수가 던진 공이 홈 플레이트까지 어떤 궤적을 그리며 날아가는지 알 수 없다. 자리에 따른 편차도 크다. 특히 홈플레이트까지 거리가 100m가 넘는 외야 관중석에 앉으면 심판이 스트라이크 콜을 해도 들리지도 않는다. 전광판에 스트라이크를 뜻하는 주황색 등이 켜지면 그제야 그런가 보다 할 뿐이다. 선수들은 손가락만 해 보이고 공은 콩알보다도 작다. 게다가 고막을 찢을 듯한 시끄러운 응원 소리나 동행인과의 잡담 때문에 경기에 집중하기도 쉽지 않다. 좁은 공간에서 치맥을 즐기느라 손과 입은 번잡하고, 응원단의 율동을 따라 하고 함성을 지르느라 볼카운트 같은 경기 상황을 놓치기도 한다. 사실상 야구 자체에만 집중하기 어렵다는 얘기다. 당연히 경기의 세부 내용을 자세히 확인하기는 불가능에 가깝다.


그렇다면 야구팬들은 왜 야구장에 갈까? 거실 소파에 앉아 TV 중계를 보는 편이 디테일을 파악하고 경기를 분석하기엔 훨씬 좋을 텐데 말이다. 캐스터와 해설위원은 경기에 대해 상세히 설명해 주고, 중계 방송사는 투수와 타자의 상대 전적이나 타자의 득점권 타율 같은 다양한 부가 정보도 제공한다. 시끄럽고 번잡한 야구장보다 TV 중계가 야구 경기를 훨씬 더 세밀하게 즐길 수 있는데 굳이 돈 내고 야구장에 갈 이유가 있을까? 하지만 야구장에 가야만 느낄 수 있는 것들이 있다. 시원하게 휘두른 배트에 맞아 날아가는 타격음과 거기에 반응해 열광하는 관중들의 함성소리는 TV 스피커로는 제대로 전달되지 않는 무엇이다. 결정적인 순간에 찾아오는 순간적인 정적과 갑작스럽게 터지는 환호는 선수와 팬 모두가 경기에 몰입하며 자연스럽게 교감하고 있다는 방증이다. 응원팀의 유니폼을 입고 응원 도구를 흔들며 응원가와 율동을 따라 하는 것 또한 야구를 즐기는 방식이며, 날아오는 파울볼을 피하거나 홈런볼을 잡으려고 뛰어다니는 것조차 재미요소 중 하나다. 이런 날것의 현장감과 몰입감, 그리고 선수나 다른 팬들과 교감하는 즐거움이 야구장을 찾는 이유가 아닐까. 자잘한 디테일은 조금 놓칠지언정 야구의 참맛을 제대로 느낄 수 있으니까.


와인도 마찬가지다. 반드시 와인 그 자체에만 천착할 필요는 없다. 오히려 멋진 장소에서 와인과 어울리는 음식을 곁들이고 사람들과 이런저런 대화를 하며 마시는 와인이 훨씬 맛있고 즐거울 테니까. 물론 그런 것들이 와인에 대한 집중력을 조금 떨어뜨릴지도 모른다. 치즈가 와인 풍미를 가리는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치즈가 와인과 어우러져 만들어내는 풍미의 상승작용이 이를 보완하고도 남듯이, 함께 마시는 사람과 쾌활한 분위기가 와인의 맛을 돋우고, 와인에 대한 더욱 좋은 경험을 남겨줄지도 모른다. 고기에 꼭 소금만 살짝 찍어서 먹어야 참맛을 느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가끔은 상추에 마늘과 파절이 넣고 쌈장 얹어 큼지막한 쌈을 싸 먹어도 맛있는 것과 같은 이치랄까. 와인만 한 잔 따라놓고 그 풍미만을 온전히 즐겨도 좋겠지만, 항상 그럴 필요는 없다는 얘기다. 생각해 보자. 내가 원하는 것은 와인을 파악하고 평가하기 위한 테이스팅인가, 아니면 맛있게 마시기 위한 드링킹인가. 실험실과 같은 환경에서 진행하는 정교한 와인 테이스팅은 와인 평론가나 와인대회 심사위원에게 맡겨두자. 우리의 몫은 신나게 와인을 즐기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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