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1 다시 찾을 수 없어 더 선명해지는 저녁의 기억
파리(Paris)는 애초 계획에 없었다. 목적지는 벨기에 코르트리크에서 열린 박람회였다. 그런데 항공편이 파리를 경유하게 됐다. 이왕 그렇게 된 거 숙소를 파리에 잡고 코르트리크까지 차로 오가기로 했다. 2017년 쌀쌀맞았던 어느 가을, 그렇게 엉겁결에 내 생애 처음으로 ‘파리’와 만났다.
공항에 내리자, 스피커에서 프랑스어가 속사포처럼 쉬지 않고 쏟아져 나왔다. 도심까지 이동하는 밴에서 자작하게 들리는 라디오의 멘트에는 멜로디가 있었다. 프랑스어의 억양과 발음은 유독 부드럽고 로맨틱하다. 단어 사이의 경계가 모호하고 모든 음절을 비슷한 길이로 발음한다. 자음보다 모음의 비중이 높은 탓도 있겠다. 아니, 그냥 프랑스라는 나라가 그렇다.
첫 파리는 퇴근 시간대였다. 거리에 있는 모두가 저마다의 취향으로 자유분방하게 퍼져 나가고 있었다. 뒤에 차가 오건 말건 천천히 자전거 페달을 밟는 사람, 헤드폰을 쓰고 스케이트보드를 타고 한쪽 발로 땅을 박차는 사람, 스쿠터를 타고 요리조리 차 사이로 막 가는 사람, 묵묵히 앞만 보고 걷는 사람, 버스 승객석에 앉아 머리를 차창 밖에 기대고 목적 없는 눈빛으로 스마트폰을 보는 사람. 아무런 말 없이 어디로 가는가.
숙소로 가기 전 밥부터 먹었다. 센스 넘치는 부장님은 일행을 위해 레스토랑을 예약해 두었다. 밴은 우리를 보부르 지역에 있는 퐁피두 센터에 내려주었다. 건물 안에 있어야 할 파이프들이 밖으로 드러난, 생전 처음 보는 양식의 건물이었다. 실제로 파랑은 공기, 녹색은 물, 노랑은 전기, 빨강은 이동 통로다. 현대 미술관, 공공 도서관, 음향 연구소 등이 마련된 복합 문화센터다. 튜브처럼 생긴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꼭대기 층으로 향했다. 고도가 올라갈수록 땅거미가 짙게 내려앉은 파리의 스카이라인이 눈에 장엄하게 들어찼다.
퐁피두 센터 6층 루프톱에는 ‘Le Georges’라는 레스토랑이 있었다. 입구부터 우아한 분위기의 미녀 두 분이 우리를 맞이해 주었다. 솔직히 처음 든 생각은 ‘다들 너무 예쁘고, 멋진데?’였다. 남녀 스태프 모두가 화려하진 않지만, 최대한의 예의와 멋으로 가득했다. 테이블 위에는 장미꽃 생화가 한 송이씩 꼿꼿하게 서 있었다. 알루미늄을 곡선으로 유려하게 가공해 주방과 바, 코트 체크 공간 등을 유기적으로 꾸몄다. 14시간의 비행을 좀 전에 마친 나의 편하디편한 복장이 조금은 미안할 지경이었다.
우리는 창가에 앉았다. 창문 너머 저 멀리 무언가 반짝거렸다. 에펠탑이었다. 에펠탑은 해 질 녘부터 자정까지 정각마다 5분 정도 반짝이는 이벤트를 진행 중이다. 그 모습이 마치 크리스마스트리 같다. 나는 내 생애 최초의 에펠탑을 이렇게 멀리서 반짝 보았다. 메뉴판을 보았다. 딱 한 장의 종이에 깔끔하게 이름과 가격만 적혀 있었다. 극단적인 단순함은 상상력을 자극한다. 순간 메뉴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BEAUTIFUL PAN-SEARED, VEAL CHOP, MASHED POTATOES. 나는 ‘BEAUTIFUL’에 꽂혔다. 팬에 구운 ‘아름다운’ 송아지 스테이크라니. 와인으로 물랭 드 라 라귄(MOULIN DE LA LAGUNE) 2012를 곁들였다. 보르도가 고향인 와인들은 뭘 시켜도 실패하지 않는다.
사실 음식 맛은 잘 기억나지 않는다. 기억나지 않는 걸 보면 특별히 맛이 없었던 건 아니다. 먹을 만했을 것이다. 나는 맛있었던 음식보다 맛없었던 음식을 더 강렬히 기억한다. 내가 이 레스토랑을 기억하는 건 다른 이유다. 고기를 얇게 썰어 입에 넣고, 와인을 한 모금 호로록 곁들이고 나서야 이들이 왜 고기 앞에 그런 형용사를 넣었는지 알았다. 눈앞에 내가 소중히 여기는 이들과, 그 뒤로 어슴푸레 개와 늑대의 시간(l'heure entre chien et loup)에 진입한 파리 시내가 한눈에 들어왔고, 에펠탑이 반짝이고 있었다. 낯 간지러워 이런 표현은 웬만해서는 잘 안 하지만, 정말이지 끝내주게 아름다웠다. 파리의 첫인상이었다.
그 이후로 파리를 몇 번 올 일이 있었다. 그때마다 난 이곳을 루틴처럼 찾았다. 매번 친구들, 동료들을 데려갔다. 그리고 아름다운 송아지 스테이크와 와인을 마시며 다시 오지 않을 것 같은 그 시간을 꾹꾹 눌러 담아 즐겼다.
그리고 최근 안타까운 뉴스를 접했다. 퐁피두 센터가 약 5년간 리뉴얼 공사에 들어간다는 것. 이미 지난 3월부터 현대 미술관과 공공 도서관 등이 차례대로 폐쇄됐다. 이유는 석면 제거와 안전, 에너지 효율 강화, 공간 재구성 등이다. 내 첫사랑과도 같았던 Le Georges 역시 2025년 9월 23일을 마지막으로 문을 닫는다. 다른 공간은 2030년에 다시 문을 열지만, Le Georges는 영구 폐쇄다. 나에게는 부고장과도 같다. 현실적으로 살아생전 다시는 못 본다. 오래도록 그리워하고 기억할 것이다.
Oct, 20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