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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회동 Aug 14. 2020

또 하나의 망작

1.  탁. 열심히 달리던 커서가 화면 끝자락에서 멈추자마자 머릿속 회로가 퍽 하고 나가버렸다. 그렇게 시작된 10초간의 공백. 그 하얀 여백은 갖가지 소음들로 조금씩 물들어간다. 사각사각. 대체 옆 사람의 전공은 뭐기에 펜 소리가 그치지 않는 걸까. 분명 활자 교정 중독자가 틀림없겠지. 타닥타닥. 저 구석 어딘가 에선 딱따구리 소리마냥 노트북 자판 소리가 들려온다. 창작의 고통이 서린 자소서일까, 아니면 인용과 표절 사이에서 표류하는 레포트일까. 다만 분명한 건 소리의 강도가 점점 커지는 것으로 보아 그 사람의 영혼 역시 하염없이 허공을 때리고 있는 중임엔 틀림없다.  사각사각, 타닥타닥. 이 소리들로 가득 찬 시공간 속에서 두 눈은 환하게 빛을 뿜어내는 노트북 화면만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다. 집 근처 카페로 피곤한 몸을 이끌고 카페인의 힘을 빌려 에세이를 쓰고 있지만, 대체 내가 지금 무슨 문장을 쓰고 있는지 도저히 모르겠다. 분명 한국어인데 문법은커녕 단어 하나하나도 제대로 맞아 들어가는 기분이 들지 않는다. 이걸 열심히 쓴다고 오래전에 접은 작가라는 꿈이 다시 꿈틀대기나 하는 걸까. 피곤은 망상을 낳고 망상은 포기를 낳는다. 노트북을 닫고 아이폰을 꺼낸다. 역시 글은 메신저 위에서 활력을 되찾는다. 눈동자를 고정시킨 채 삼십 분 가량 친구들과 톡을 주고받는다. 어렵게 아이폰을 집어넣고 다시금 에세이에 집중한다. 이런, 이제는 니코틴이 나를 부른다. 가방 안에서 하얀 분필 비스무리 한 것을 꺼내 카페 문밖을 나선다. 2.  딸랑딸랑. 문을 열고 나와 숨을 크게 들이쉰다. 역시 밤공기는 초여름이 제일이다. 춥지도 덥지도 않은 것이 선선하여 기분이 좋아진다. 탁탁. 또 이러네. 탁탁. 간신히 성공했다. 라이터도 기분이 좋은지 잠시 제 할 일을 미루고 있었나 보다. 카페 화장실을 다녀오는데 건물 복도에 자판기가 보인다. 저벅저벅. 학생이라면 모름지기 하루 커피 세 잔은 꼭 갖춰야 할 소양인 법. 지갑에서 꼬깃꼬깃하게 접힌 천 원짜리를 곱게 펴 자판기 안으로 집어넣는다. 지이이잉. 지폐 투입구는 돈을 내뱉는다. 다시 천 원을 꾹 눌러서 투입구로 부드럽게 밀어 넣는다. 그리고 다시 한번의 지이이잉. 아니 이게 무슨 되새김질하는 것도 아니고. 짜증을 뒤로하고 양손을 이용해 지폐를 다림질하듯 깔끔히 펴준다. 지이잉, 반짝. 이제야 자판기에 불이 들어온다. 손가락은 천 원짜리 조지아 커피로 향한다. 우당탕. 커피 캔 하나가 경쾌한 소리를 내며 저 아래로 떨어진다. 우당탕. 언제 들어도 참 기분 좋은 소리다. 직장도 이렇게 쉽게 떨어지면 좋으련만. 삼성, 우당탕. CJ, 우당탕. 공기업, 우당탕탕. 5급 공채, 우당탕퉁탕. 3.  딸깍. 커피 캔을 따고 입 속으로 한 모금 들이킨다. 싸구려 원두와 설탕 덩어리가 뒤섞여 식도 저 아래로 밀려 떨어진다. 그렇게 기억도 저 멀리 과거로 쓸려 내려간다. 어릴 적엔 참 꿈 많은 아이였다. 문학적으로 멋져 보였던 국어 선생님의 영향으로 작가가 되고도 싶었고, 팝콘과 콜라에 이끌려 찾아간 영화관에서 뜻하지 않은 전율을 느껴 영화감독이 되고도 싶었다. 뜬구름 같지만 당시에 나름대로 뜨거웠던 꿈들은 어른들의 말들로 조금씩 현실 세계에 발을 들이기 시작했다. 너는 머리가 크니까 변호사가 좋겠다. 에이, 무슨 얘가 변호사예요. 돈은 회계사가 더 많이 벌죠. 체력이 약하니까 몸 쓰는 일은 힘들겠고. 그렇죠, 그냥 안정적으로 공무원 해야죠. 슬프게도 어른들의 말은 일본 쓰나미처럼 내 일상 깊숙이 흘러들어왔고 내가 처음으로 가진 꿈들은 후쿠시마 원전처럼 펑 하고 터져버렸다. 속이 없던 나는 애석하게도 연금과 무관한 나의 꿈들을 탓하곤 했다. 덕분에 좋아하고 하고 싶었던 일들은 오직 자기소개서의 취미 란에서만 숨 쉴 수 있었다. 4.  꿀꺽. 다시 한번 온몸에 카페인이 퍼져가고 정신이 또렷해진다. 생각해보면 내 주위 사람들도 별반 다른 것 같지는 않다. 머리는 좋은데 특별한 꿈은 없고, 하는 것들은 많은데 미래에 대한 확신을 줄어들고. 꿀꺽꿀꺽, 쓰읍. 어느새 캔 속엔 옅은 커피 향만이 남아 있다. 고개를 들고 캔을 탈탈 털어보지만 남은 몇 방울만이 혀끝에 걸릴 뿐이다. 문득 자신의 꿈을 이룬 사람들이 성공의 사례로 출연해 강연을 하는 어느 TV 프로그램이 떠오른다. 그들은 성공하는 사람과 실패하는 사람의 차이에 대해 각종 명언들을 긁어모아 침이 튀도록 강연하곤 한다. 주된 내용은 계속해서 꿈을 꾸라는 것. 다 마신 커피 캔을 구긴다. 요즘 세상이 꿈만 꿔서 될 세상인가. 더욱더 힘을 준다. 구겨져도 한참 더 구겨져야 한다. 알루미늄의 울부짖는 외침을 뒤로한 채 우그러뜨려진 캔을 쓰레기통을 향해 던진다. 캔은 쓰레기통을 빗맞고 복도 위로 덩그러니 떨어지고 만다. 5.  터벅터벅. 무딘 발걸음을 옮겨 다시 카페로 들어선다. 무언가에 열중하는 사람들로 인해 카페 내부는 여전히 사각사각과 타닥타닥으로 가득 차 있다. 끼이익. 의자를 바짝 당겨 앉아 노트북 위로 손을 가져간다. 힘을 짜내어 계속해서 문장을 이어나간다. 이러다간 이번 주에도 글 마감 기한을 못 지킬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10분간의 짧은 휴식이지만, 어딘지 모르게 저들과 갭이라는 것이 생겨난 것 같다. 어쩌면 그 강연자는 단순히 꿈만 꾸라는 것이 아니라, 꿈을 실현하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고 그 꿈을 방해하는 모든 것들에 대해 극복의지를 가져야 한다고 말했던 것일지도 모른다. 노트북 속 커서는 계속해서 깜빡이고 나는 지난날을 되돌아본다. 내가 체념과 순응에 등 떠밀려 살아왔다는 것을 부정하지 못하는 까닭은 어릴 적 뜨거운 마음으로 가졌던 꿈들이 하나 둘 기력을 다해갈 때 용기 내어 그것들을 받쳐주지 못한 데에 있다. 나는 어떠한 노력도 하지 않았고, 죽어가는 꿈들에 대해 엄마를 잃은 어린아이 마냥 주저앉아 울기만 했다. 뒤늦게 지난날의 과오를 알아차렸을 땐 이미 커피 잔 속 얼음이 모두 녹고 난 뒤였다. 6.  위이이윙. 아이폰이 울린다. 아들, 언제 와. 엄마의 문자에 급격히 집에 가고 싶은 충동이 커진다. 모든 인간에겐 귀소본능이 있다고 했던가. 하지만 아직 집에 갈 순 없다. 갑작스레 쏟아지는 상념에 글은 반절도 채 쓰지 못했다. 늦게 들어가요. 답장을 하고 다시 노트북으로 시선을 옮긴다. 역시 집보다는 조용한 카페가 글이 더 잘 써지지. 뚜벅뚜벅. 막 문장을 이어가려는 찰나 저 멀리서 종업원이 쭈뼛쭈뼛 걸어온다. 손님, 죄송하지만 영업시간이 다 되어서…. 이럴 수가. 나는 아직 할 일이 남았다고. 종업원은 계속해서 나를 빤히 쳐다본다. 아, 네. 황급히 가방을 싸서 나온다. 족히 세 시간이 넘는 시간을 나는 과연 무엇에 소비한 것일까. 공기에서 어딘가 모르게 쌀쌀함이 느껴진다. 이번 주에도 마감 기한을 지키기 힘들 것 같다. 밤하늘의 별이 깊어만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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