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저는 죽어야 한다, 비토리오 & 파울로 타비아니, 2012.
예술은 인간을 고통스럽게 만든다. 인간에게 접근할 수 없는 위치에 잠시 도달할 수 있게 만들며, 인간은 그 도달하는 순간을 현실과 혼동한다. 예술을 몰랐던 존재에게, 예술적 경험은 마치 판도라의 상자가 열린 것이다. 걸인에게 귀족들의 삶을 일시적으로 체험하게 만드는 것은 상당히 잔인한 일이다. 그렇기 때문에 타비아니 형제의 영화 <시저는 죽어야 한다> (2012)는 가장 잔인한 설정을 영화에 담는다. 살인, 강간, 사기 등으로 감옥에 수감된 죄수들에게 셰익스피어의 가장 고귀한 로마 사극 중 하나인 <줄리어스 시저>를 무대에서 연기하게 만든다. 가장 추악한 범죄자들이 로마 시대 대의와 도덕률을 논하던 국가의 지도층을 연기한다. 사회의 바닥과 같은 존재가 연극이라는 매체를 통해 사회를 이끌어 나가는 최상위 계층을 간접적으로 체험한다.
영화는 <줄리어스 시저>의 공연을 막 마치는 마지막 장면으로 시작한다. 재소자들의 공연이 끝나고 난 후, 화면은 갑자기 흑백으로 바뀌고 시점은 6개월 전으로 돌아간다. 이후 영화는 다시 첫 장면이 재등장하는 시점까지 화면은 계속해서 흑백의 톤을 유지한다. 즉, 영화에서 컬러 톤이 등장하는 시점은 연극이 상연되는 시점, 그리고 그 연극이 끝나고 난 뒤의 재소자들의 감옥 안의 모습이 전부다. 시간으로 구분하자면, 연극이 대중들에게 보이기 전의 순간들은 무채색으로 담았으며, 연극이 상연된 시점 이후부터 화면은 유채색으로 바뀐 것이다. 흑백 화면의 속성은 이분법적이다. 사람들은 법의 판결에 따라 유죄와 무죄로만 구분되며, 감옥은 유죄 판결을 받아 철저히 격리된 공간이다. 범죄자들에게 사회의 빛은 도달되지 않으며, 빛이 도달되지 못한 감옥이라는 공간은 어둠의 속성을 더 도드라지게 만든다. 그러나, 영화가 진행할수록 형식에 여러 변화들이 생긴다. 모두 방에서 지내는 시간조차 낭비하지 않고 연습에 몰두한다. 이들은 대사 전달뿐 아니라 특정 장면에서의 몸의 위치와 자세까지도 신중히 점검하며 심지어 눈을 뜨고 감는 작은 표현을 어떻게 해야 할 것인지 진지하게 고민한다. 재소자들이 연기에 몰입할수록, 영화는 본래 취했던 다큐멘터리적 접근에서 점차 극영화의 형태로 발전한다. 화면의 구성 또한, 흑백 톤의 어둠을 강조하며 실내 위주의 촬영에서 흑백 톤의 밝음을 강조하는 실외 촬영으로 변화한다. 영화는 이들의 성장을 카메라를 통해 포박했으며, 재소자들을 바라보는 카메라는 점차 관조하는 방향에서 연습하는 모든 순간을 재배열하는 적극적인 방향으로 변화한다.
이 영화는 초반의 다큐멘터리적 구성의 성격을 완전히 버리고 극영화로 전환되는 반환점이 있는데, 바로 줄리어스 시저 역의 지오반니 아르쿠리와 데시우스 역의 후안 보네티가 서로 감정이 틀어져서 주먹다짐이 오갈 것 같은 험한 분위기에 휩싸이고 연습이 잠시 중단되는 장면이다. 이 갈등을 말리길 원하는 이는 루시우스 역을 맡은 또 다른 재소자인 빈센조 갈로이다. 그는 감독에게 연극이 중단되길 원치 않는다며 이 둘의 갈등을 중재하길 요청한다. 이 둘의 다툼이 끝난 뒤, 빈센조는 홀로 방 안에 남아 반대편 벽에 붙어있는 바다 그림을 바라본다. 이때 영상은 그림을 서서히 줌 인(Zoom in)하면서 그림을 확대하고, 영화의 러닝 타임 내내 흑백이었던 화면은 잠시 컬러로 처리된다. 죄의 유무로만 구분되는 범죄자에게 유채색의 바다는 자유를 향한 갈망으로 다가온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다음 장면은 수많은 방들이 다닥다닥 붙어있는 감옥의 전경이며 화면 역시 다시 흑백으로 바뀌고 수감자들이 침대에 누워있는 장면들이 연이어 나타난다. 하나같이 쉽게 잠들지 못하고 속마음은 속삭임의 형태로 들린다. 장면의 포커스는 얼굴들에서 창문들로 옮겨가고 창문들은 곧 여러 채의 건물들로 옮겨간다. 조그만 물살이 파동을 치듯이, 갇혀있는 재소자들의 상황과 바다의 파도는 대비되어 비춰진다. 예술은 수감자들에게 유채색의 삶을 보여주지만 그들의 현실은 여전히 흑과 백만이 존재한다.
이후 영화는 감옥을 배경으로 하지만, 다큐멘터리 특유의 관찰자가 아닌 역동적인 극영화의 성격을 더욱 부각한다. 브루투스 역의 살바토레 스트리아노가 그의 명대사를 감옥의 중앙에 외칠 때, 연극에 참여하지 않는 모든 재소자들도 창틀에 매달려 로마 군중을 연기한다. 안토니의 항변이 선포될 때에도 모든 감옥의 구성원은 하나의 극 장치로 작동한다. 이 영화는 기존의 장르를 깼다. 다큐멘터리가 가진 상황에 대한 기록 혹은, 사전의 연출에 의한 작법이 아닌 ‘사후 재구성에 의한 연출’을 택한다. 현장에 대한 기록이 아닌, 사건이 발생된 이후 그 상황을 다시 ‘대본화’시켜 극영화 특유의 밀도 높은 구성을 구현해냈다. 동시에, 다큐멘터리적인 초반의 톤을 계속해서 유지시킬 수 있었다. 이 영화를 시간 순서로 배열하자면, 다큐멘터리에서 극영화로 변해가는 모습을 더 확연하게 볼 수 있다. 초반의 수감자들을 모아 오디션을 보고 이들이 드문드문 합을 맞출 때에는 카메라는 개입을 하지 않는다. 그러나 앞서 언급한 바다를 보여주는 장면 이후, 감옥이라는 장소를 새로운 연극 무대의 연장선으로 재배열한다. 수감자들 또한 죄수에서 점진적으로 줄리어스 시저의 인물 그 자체가 된다.
연극은 성공적으로 막을 내렸고, 죄수들은 박수갈채를 받았다. 많은 성장 영화는 여기서 마무리를 지으려고 할 것이다. 그러나, 영화는 그들을 도로 감방에 넣는다. 죄수는 읊조린다. “예술을 경험하고 나니 이 방이 감옥이 되었구나." 마치, 체스 게임이 끝나면 왕도 기사도 일개 병사도 모두 체스 통 안으로 다시 들어가는 것처럼 영화는 이들의 현실을 상기시킨다. 예술은 그만큼 잔인했다. <줄리어스 시저>를 통해 죄수들은 고귀한 가치들을 이야기한다. 대의와 도덕률, 희생과 정치적 논쟁. 고작 담배 밀수 따위로 친구를 죽인 범죄자들은 차마 넘볼 수도 없는 세계를 예술을 잠시나마 가능하게 만들었다. 흑백으로 가득했던 감옥에 예술은 유채색이 있을 수도 있음을 알려주었다. 그러나, 그것은 비극이었음에 분명하다. 영롱하게 빛나는 유채색의 세상은 그들의 작은 감방을 더욱더 잿빛으로 만든다. 오늘 아침에는 분명히 나는 시저였고, 브루투스였으며, 안토니였으나 저녁에는 간수의 허락 없이는 한 발자국도 나가지 못하는 자다. 살아있음을 만끽하게 했던 예술은 찰나의 진통제였던가? 여전히 그들의 현실은 두터운 철문이 지키고 있으며, 그들에게 허락된 것은 초라한 무채색 감옥 속 커피 한잔이 전부다.
그럼에도 우리는 반문한다. 예술을 알고 나니 이들의 삶의 질이 갑자기 떨어진 것인가? 아니다. 이들의 현실은 이미 실존했으나, 예술은 그들의 위치가 어디쯤 된다는 것을 깨닫게 만든 것이다. 이들의 위치를 파악한 것은 더 이상 그들을 불행하게 만들 수가 없는 것이다. 나의 세상을 깨고, 나의 세상을 확장시키는 것, 그것은 실로 아름다운 경험일 것이다. 그들의 일시적인 비참함은 더 넓은 세상으로의 도약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 넓은 세상의 대양에서 우리는 이 얼마나 작은 존재인가를 깨닫는 것, 그것에서부터 알을 깨는 행위는 시작하지 않는가. 그것이 이 거대한 세상에 유기되었다고 느낀 채 하루하루를 겨우 내는 우리에게 예술이라는 은혜가 임한 것이다. 예술은 애당초 바닥과 꼭대기를 오간다. 그에게는 정상 위의 것을 나락으로 빠트리게 할 수 있으며, 나락을 들어 올려 정상으로 향하게 할 수도 있다. 삶과 예술 그 끄트머리에 서서 위를 바라볼 수 있게 만든 것은 다름 아닌 예술이다. 두 발이 어디에 놓여 있는가를 알 수 있는 그 작은 걸음이 비참해 보일지라도, 하나의 도약이 된다는 것을 이탈리아의 늙은 형제들은 알고 있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