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침과 속삭임, 잉마르 베리만, 1972
외침은 산발적이다. 소리가 발생하는 순간 공간과 공간을 순회하며 확산되기에, 어느새 그 소리의 근원에는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는다. 누군가가 듣기를 원하며 울부짖지만, 그 표출의 방향성은 명확하지 않다. 반면, 속삭임은 그 자리에 오랫동안 머문다. 스스로가 한정하는 공간 안에서만 소리는 머무르며, 때때로 그 속삭임에는 어느 누구도 포함시키지 않기도 한다. 그렇기 때문에, 외침은 허망하고, 속삭임은 간교하다. 잉마르 베리만의 <외침과 속삭임> (1972)은 그 허망함과 간교함의 사이를 부유하는 세 여인과 그것을 보조하는 하녀의 이야기이다.
영화는 붉은 저택에서 힘겹게 숨을 헐떡이는 장녀 아그나스의 모습을 그리며 시작한다. 비교적 짧은 러닝타임인 90분 중 7분이라는 긴 시간을 할애하여, 아그나스의 거친 숨소리와 시계추의 소리를 반복적으로 노출시킨다. 대사는 전혀 배제한 채, 오로지 사운드의 극대화로 진행되는 영화는 아그나스의 일기로부터 모든 서사가 시작한다. 집안의 둘째인 카린과 막내인 마리아는 아그나스의 병세가 위독해지자 자신의 남편들과 함께 저택에 방문하여 그녀를 간호한다. 그리고 세 자매 곁에는 그들의 시중을 드는 하녀 안나도 아그니스를 간호한다. 마리아는 아그니스를 진찰하러 온 의사에게 유혹을 하지만, 도리어 의사는 그녀를 거울 앞에 세워 비난하며 그녀에게 모멸감을 준다. 마리아의 남편은 오히려 그런 마리아에게 질투를 느끼며 그녀가 보는 앞에서 자살시도를 하지만, 마리아는 황급히 자리를 뜬다. 그날 밤, 카린은 이상한 소리를 들었다며 불안함을 감지하고, 아그니스는 극심한 고통을 호소하며 안나를 찾는다. 안나는 그런 아그니스를 위해서 자신의 유방을 그녀에게 내어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그니스의 병세가 급격하게 위독해져 갔고, 마리아는 그녀에게 소설을 읽어주지만 결국 그녀는 숨을 거두었다.
카린은 규범적인 생활이 요구되는 외교관 남편과의 생활에 외적으로 순응하지만, 내적으로는 허무함을 느끼면서 식사 도중 깨진 와인잔 조각으로 그녀의 성기를 훼손하고 그 피를 자신의 입에 잔뜩 바른다. 그다음 날 카린은 아그나스의 일기를 발견하게 되고, 마리아는 그녀에게 위로의 접근을 하려 하지만, 카린은 마리아의 접근을 거절한다. 그날 밤, 마리아는 카린과 서로의 관계를 회복하기 위하여, 카린에게 손을 내밀고 그들의 관계는 발전된 듯한 양상을 띤다. 그러던 도중, 죽은 아그니스가 깨어나 카린과 마리아를 찾아 자신의 손을 잡아달라고 부탁하지만, 카린은 그녀가 아그니스를 혐오한다며 매몰차게 거절하고, 마리아 또한 끝내 아그니스의 손을 뿌리치고 도망친다. 시종일관 그녀의 수발을 들던 안나만이 유일하게 그녀의 곁을 지킬 뿐이다.
마리아와 카린은 모든 법적인 문제를 해결한 이후 붉은 대저택을 떠나려고 한다. 그녀의 남편들은 안나에게 재정적인 보상을 하길 거절하고, 대신 카린과 마리아는 안나에게 이 저택에서 아그니스의 물건 중 한 가지를 소장할 수 있게 허락한다. 또한, 이달 말까지 안나가 이 저택에 머물 수 있게 허락한다. 카린과 마리아는 저택을 떠나면서, 전날 밤의 둘의 관계를 부정하고 혐오하며 갈라선다. 안나는 아그나스의 많은 물건 중 붉은 일기장을 고르는데, 그 일기장에는 아그나스가 건강했을 때 세 자매와 안나가 모두 화목하게 있었던 그때를 행복이라 칭하며 회상하고 있었다. 그렇게 영화는 막을 내린다.
영화는 분명하게 세 자매의 속성을 구분한다. 아그니스는 영화가 시작하는 그 시점부터 죽음을 목전에 둔 채, 오로지 살기만을 희망한다. 그녀는 고통이라는 늪에 이미 빠져있기에, 살려달라는 외침만이 영화 내내 울린다. 아그나스는 안나의 이름을 간절히 부르짖지만, 이는 오로지 살고자 하는 욕구에서 비롯된 울부짖음이다. 결국 그녀는 그렇게 죽어나갔고, 죽음 이후에도 자매들을 향해 간절히 외친다. 그렇다면 왜 그녀는 살기를 원하는 것인가? 그것은 소외됨의 두려움이 강하게 작용한 것이다. 그녀는 영화 속에서 마리아와 어머니에 의해 배제된 유년의 경험을 트라우마처럼 간직하고 있다. 오로지 아그니스만이 이 영화에서 죽음의 영역에 있음으로 다시 한번 그녀는 공동체에서 배제되어 소외된다. 죽음은 삶의 영역으로 넘어갈 수 없으며, 삶 또한 죽음의 영역으로 넘어갈 수 없기에 죽은 자는 헛헛한 소외감만은 안고 지낼 수밖에 없다. 허망한 감정은 결국 외침의 속성인 것이다. 멀리 그 두려움을 퍼뜨리지만, 뚜렷한 대상 없이 외로움과 두려움만으로 그 외침을 분출하기에, 어느 누구에게도 도달하지 못한 채 버려진다.
그렇다면 살아있는 카린과 마리아는 속삭이는 이들이다. 자신이 드러나는 외부 세계와 스스로가 형성하는 내면은 엄연한 경계선을 지닌다. 카린은 규범을 순응하는 외면과, 스스로를 혐오하여 아무도 들여보내길 원치 않는 내면을 지닌다. 자기혐오는 결국 이 내면과 외면의 상충하는 지점에서 발생한다. 메워질 수 없는 간격에서 실감하는 절망함이 곧 자기혐오로 이어지는 것이다. 스스로가 갖고 있는 내면의 욕구를 발현하지 못하면서, 그녀는 자기를 속인다. 마리아 또한 마찬가지다. 카린과 남편에게 대하는 태도는 일맥상통한다. 카린에게 감정의 벽을 허물자며 먼저 제안하고서도 그녀는 카린의 내면을 보고 도망쳐 나온다. 남편에게 바른 아내의 모습을 보이는 것처럼 이야기하지만, 남편이 본인의 외도 사실에 자살시도를 벌이는 광경에서 그녀는 다시 그 자리를 혐오스러워하며 도망친다. 그녀가 외적으로는 타인을 포용할 수 있다고 이야기하지만, 실제로 그녀가 포용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타인의 너절한 내면의 상처 앞에서 그녀는 혐오의 표정을 지으며 뒷걸음질 칠 뿐이다. 그녀 또한 자신과 타인을 속인다. 그렇기에 속임수는 간교하다. 자신이 한정한 범위에서만 소리가 머물러야 하는 이유는, 이 소리는 누군가가 들어서는 안되기 때문이다. 스스로와 타인을 끊임없이 속이며 모순되는 이미지를 만들어야 하는 것이다. 그렇기에 카린과 마리아는 아그나스가 죽음에서 마지막으로 외치며 눈물을 흘릴 때 그들은 외면하고 도망쳐 나올 수밖에 없다. 그들은 스스로의 내면마저 감당하기 어려워하는 속삭이는 자들이기에, 무엇보다 진실하고 간곡한 어쩌면 처절한 외침은 우둔하게 보일 뿐인 것이다.
이 영화에서 그럼 가장 중요한 인물은 누구인가? 그것은 바로 하인인 안나이다. 많은 이들이 영화를 보면서 안나가 아그니스에게 자신의 유방을 내어주는 장면을 동성애적 코드로 해석하곤 한다. 그러나, 가장 먼저 떠오르는 장면은 바로 ‘피에타’이다. 아그니스는 고통에 몸부림치는 예수의 모습으로, 그리고 안나는 그런 예수의 고통에 슬퍼하며 그를 위로하려 하는 성모 마리아가 된다. 안나만이 유일하게 아그나스의 외침에 귀를 기울이는 이다. 아그니스는 왜 안나만을 찾은 것인가? 그것은 안나는 이 영화에서 모성으로 대변될 수 있는 자이기 때문이다. 아그니스가 죽음의 공포 앞에서 떠올린 트라우마는 어머니로부터 받지 못한 사랑이었다. 그러나 안나는 그런 아그니스에게 자신의 유방을 허락하며 따스하게 안아준다. 아그나스는 안나에게서 모성이 주는 온화한 품을 느끼는 것이다. 그리고 안나는 그렇게 아그나스의 곁에 머물러준다. 간교한 속삭임이 허망한 외침을 아둔함으로 치부할 때에도, 모성은 그들의 내면을 간곡히 들어준다. 그렇기에 안나는 마지막 물품으로 아그나스의 일기장을 고르는 것이다. 죽음은 삶을 삶은 죽음을 맞닿을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이것을 뛰어넘을 수 있는 유일한 해답을 베리만은 초월적 모성에 기대고 있는 것이다. 이는, 아그나스 이후에 카린과 마리아 안나가 등장하는 첫 장면에서 더 도드라지게 강조된다. 카린은 결혼반지를 만지며 서류를 정리하는 모습을 보이며 외부적 규율에 대한 불만족과 그것에 대한 순응 사이에서 갈등한다. 마리아는 침대 위에 누워서 각 층이 나눠진 공간을 바라보며 그것에 대한 포용하는 시선을 보내지만, 실제로 카메라는 집의 전체를 보이지 않고 분절된 층만을 보여준다. 그리고 안나는 자신의 딸의 안위를 걱정하며 신께 기도를 드린다. 여기서 우리는 명확하게 안나는 모성으로 대표될 수 있다고 보는 것이다.
그렇지만 이 모성은 본능에 의한 것이 아닌 초월적 모성이다. 유전과 태생에 의해 규정되는 것이 아니기에 이는 곳 베리만의 주된 테마인 신성과도 연결 지을 수 있다. 그렇다면, 망자의 곁을 머무는 것은 성모 마리아로 대변되는 안나인 것인가? 베리만은 여기서 수많은 질문을 던지지만, 대답은 적게 한다. <외침과 속삭임> (1972)는 그의 대표작으로 거론되는 <제7의 봉인>, <산딸기>, <처녀의 샘>, <겨울 빛> 속 흑백영화에서 던지는 신성에 대한 질문에서 조금 더 논제를 확장시켜, 우리가 신성을 논하기 위해 반드시 거쳐야 하는 죽음과 삶의 문제를 욕망에 대한 진실성과 결부시켜 논한다. 그렇기 위해서 의도적인 사운드 에디팅과, 극단적인 클로즈업, 그리고 딥 포커스를 통해서 영화는 붉은색 이미지의 불안함을 극도로 끌어올리고 동시에 저택이라는 공간을 의도적으로 축약시켜 인물들의 운동성에 집중하도록 만든다. 그 결과 우리는 외침의 허망함과 속삭임의 간교함 사이에서 부유하는 신성을 볼 수 있게 된다. 그리고 그 신성은 외침이 지니고 있는 진실성의 손을 든다. 속삭임은 스스로를 속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은 행복한 결말이라 규정할 수 없다. 이미 행복은 네 여인이 흰 옷을 입고 거닐었던 그 시간 속에 봉인되어 있고, 이미 죽음과 삶은 서로가 다시는 마주할 수 없는 순간을 교차하여 지나가버렸다. 그곳에는 오로지 죽은 자를 위로하는 안나만이 남아있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