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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앎이 Mar 24. 2020

평범함을 꿈꾸게 된 삶

어느 날 갑자기, 확 달라진 시간들에 대한 기록을 시작하며- 



도쿄라는 도시를 좋아하게 된 시작은 아주 작은 이유에서였다.

내가 가장 힘들었을 때 찾아가, 처음 마주한 도시의 첫 순간에서부터 내가 그토록 갈망하던 바람과 마주했기 때문이다.


2015년 12월 중순, 세 번째 수술을 한 지 2주 남짓 만에 두 돌이 채 안 된 아이를 데리고 도쿄로 떠났다.

아기띠에 아이를 안고 커다란 캐리어 두 개를 두 손으로 끌었다. 어깨엔 두툼한 배낭도 있었다.

혼자 떠나기로 결심하고 실행에 나선 첫 번째 여행이었다. 아이가 있으니 오롯이 혼자는 아니었지만 온전히 나의 계획과 생각, 나의 돈과 시간만으로 채운 여행은 처음이었다. 아이와 짐 가방의 무게는 느낄 새도 없었다.

"도대체 아픈데 여행을 왜 가는 거야?"라는 물음은 들리지 않았다. 내가 놓치며 흘려보낸 많은 것들을 당장 하나씩 붙잡고 싶었다. 


하네다 공항에서 시내로 가는 모노레일을 타고 얼마 안 되었을 즈음, 크게 회전하는 모노레일 창밖에 한 장면이 단숨에 새겨졌다. 높은 빌딩 가운데 한 층, 새로운 도시의 처음을 놓치지 않으려고 부릅뜬 나의 시선과 같은 위치에 형광등이 빼곡하게 켜진 넓은 사무실이 있었다. 형광등 밑 하얀 와이셔츠를 입은 직장인들이 분주했다.

낯설지도 독특하지도 않은 이 모습에서 갑자기 울컥했다. 부러워서였다. 많은 사람들이 바쁠 12월 중순 평일의 한 오후에, 낯선 나라에서 짐 가방을 잔뜩 부여잡고 있는 나의 모습은 와이셔츠들과 너무 달랐다. 홀가분하게 떠난 휴가도 아니고, 업무를 위한 출장도 아닌. 세 번째 수술을 하고 절망과 안도가 범벅이 된 상태로 병가기간에 도망치듯 떠난 여행이었으니 그 '쉼'이 내게 마냥 감사하지도 않았다. 형광등 밑 와이셔츠의 바쁨이 부러운 이유였다.



4박 5일의 도쿄는 평범함 그 자체였다.

사람들은 지하철을 타고 거리를 걸으며 일상을 보냈다. 조용하지만 바쁜, 어디서나 볼 수 있는 평범한 하루였다. 그런데도 그 닷새의 느낌이 지금까지도 생생하다. 그 때의 나도 이미 직장생활을 한 지 10년이 된 월급쟁이였지만 조용하게 그저 평범한 하루하루를 보내는 이들의 모습이 그렇게 생경하게 느껴졌다. 

언제부턴가 나는 그저 조용히, 평범한 삶을 꿈꾸고 바라게 됐다. '너무 평범하게 자라서 문제의식이 부족한 걸까'를 고민하던 철없던 대학생과 월급쟁이의 삶이 하루아침에 '그저 평범하게만 살게 해달라'고 기도하는 처지가 됐다고 생각하니 형광등 아래 하얀 와이셔츠들의 바쁨이, 말없이 발자국만 옮기던 또각 구두들의 서두름이 나를 툭 건드렸다. 멈추지 않고 하고 싶은 일을, 원하는 일상을 그대로 주욱- 평범하게만 지킬 수 있는 것이 나에겐 무엇보다 큰 바람이 되었다.


빨간 빛이 도는 도쿄타워도 무척 마음에 들었다. 낯선 도시를 헤매던 외로움을 밝혀주는 듯 했고, 길을 잃고 한참을 걷다가 찾은 빨간 타워의 불빛이 길잡이가 되어준 것 같았다. 낮에는 와이셔츠와 구두굽 소리가, 밤에는 빨간 빛을 내뿜는 도쿄타워가 나의 일주일을 편하게 해주었다. 조용하고 평범한 도시는 그래서 나에게 소중해졌다. 


하루가 멀다 하고 스타킹의 발가락 부분이 구멍나고, 구두는 몇 달을 채 못 신을 정도로 갈아치울 만큼 나도 한참을 바쁘게 서두르며 살았다. 주어진 일들에 매몰돼 정신없이 평일을 보내고 주말은 내내 자다 일어나 느즈막히 커피 한 잔을 사마시면 하루가 다 갔다. 내 삶이 확 달라지기 며칠 전, "가벼운 혹 같은 게 발견돼 병원에 입원해서 좀 쉬고싶다"는 어이없는 희망을 내뱉기도 했다. 유독 지치고 힘들 만큼 일에 빠져있어 뭐라도 핑계삼아 잠시 쉬고 싶었다. 그랬던 내가 이제 좀 그만 멈추고 싶다, 그냥 다른 사람들과 같이 1년 내내 멀쩡히 회사를 '개근'했으면 좋겠다는 소망을 품게 된 것이다. 



2011년 10월 6일 처음 갑상선암 진단

2011년 11월 10일 첫 번째 수술 (갑상선암 유두암 미만성 경화성 변종 진단, 갑상선 전절제+임파선 40여 개 절제)

2012년 4월 방사성 동위원소 치료

2012년 8월 갑상선암 임파선 전이 재발 진단

2012년 12월 24일 두 번째 수술 (임파선 절제)

2013년 3월 방사성 동위원소 치료

2014년 1월 출산

2015년 10월 임파선 전이 재발 진단

2015년 11월 세 번째 수술


그리고

2019년 11월 임파선 전이 재발 진단.

36살. 7살 딸의 엄마. 13년 차 직장인..



한 줄씩 이어지는 나의 기록, 남들에겐 '암도 아닌' 암과 싸우고 있는 나의 기록에는 수많은 고민과 바람과 생각이 담겨있다. 치료가 어려운 병을 갖고 평생을 살아가야 하는 나의 삶은 더 이상 평범할 수 없다. 그렇지만 겉모습은 누구보다 평범하고 또 일상적이다. 


지난해 연말 나는 또 다시 암이 재발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겨우 붙잡고 되돌린 듯한 일상이 다시 흔들리고 있다. 세 번째 수술을 한 다음해, 나는 그토록 원하는 대로 '개근'을 해 무사히 직장생활을 이어갔고, 아쉬웠던 만큼 더, 더 열심히 했다. 그런데 네 번째 재발, 그리고 얼마 후 다시 검사를 통해 수술을 할지 결정하게 된다. 


지난 연말부터 마치 조용한 밤길을 밝히던 도쿄타워의 빨간 불빛 같은 길잡이를 쉼 없이 찾고 있다. 아무도 알지 하는, 오직 나만 느끼는 고통의 암과 함께 살아야 하는 나의 삶. 나와의 싸움에서 이기기 위해 또 다시 끊임없이 찾고 고민해야 한다. 지난 세 번의 기록들과는 또 다르게 나는 '도대체 어떻게 살아야 할까?'를 물으며 답을 헤매고 있다. 그 답을 찾아가는 복잡한 과정을 글로나마 풀어보고 싶어졌다. 암을 통해 깨닫게 된 앎, 암을 이기기 위해 챙겨야 하는 앎.. 마치 도시 한 가운데를 밝히던 타워 불빛 같은 등불을 좇으며 살아가는 기록들을 남겨보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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