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잘 사는 진리 Feb 01. 2024

박완서 에세이 사랑을 무게로 안 느끼게 리뷰

국어선생님, 박완서는 왜 유명해?

"이게 새로 나온 작품이야?"

"응."

"박완서는 죽지 않네."


남자친구는 수능 국어 강사다. 며칠 전부터 박완서 에세이를 붙잡고 있는 나를 보며 그가 던진 말은 '박완서는 죽지 않네' 하는 것이었다. 철학적이다. 애니메이션 <원피스>에는 내가 좋아하는 귀여운 순록 쵸파가 나오는데, 그의 의술 스승인 히루루크는 쵸파가 약인 줄 알고 구해온 독버섯으로 끓인 수프를 먹고 죽게 된다. 그때 남긴 말은 원피스 전체를 통틀어서도 손에 꼽는 명대사다.


사람이 언제 죽는다고 생각하나···?

심장이 총알에 뚫렸을 때···? ···아니.

불치의 병에 걸렸을 때? ···아니.

맹독 버섯 수프를 마셨을 때···? 아니야!!!

···사람들에게서 잊혔을 때다···!!!


그런 거라면 박완서는 불사의 작가라는 생각이 떠올랐다. 에세이를 읽고 보니 정작 작가님은 자연스레 천천히 흘러가길 원했을지 모른다는 생각도 스쳐갔지만.



요즈음 출간한 내 장편소설 광고에 대하소설이란 문구가 들어가 있는 걸 보고 그 과장됨이 못내 쑥스러웠다. 어디 길다고 대하소설인가. 나는 역사의 장강을 꿰뚫어 보거나 관조할 만한 역량이 모자라고, 다만 그 장강의 한 줄기가 내 개인사를 어떻게 할퀴고 지나갔나를 진술하는 데 급급했다. 앞으로도 그럴 테고, 그런 의미로 나는 철두철미한 소설가일 뿐 대설가가 아니다.

- <사랑을 무게로 안 느끼게> p. 57 내가 걸어온 길


겸손하신 이야기다. 박완서 작가는 대한민국 사람이라면 모두가 알고 있다. 요즘 애들도 알 거다. 작가의 글은 수능 단골손님이니까. 수능 국어로 접했던 작가들은 왠지 친숙하면서도 꺼려진다. 수능 경험자라면 나와 같은 양가감정을 느낄 것이다.


수능이 지나고 나서는 차가운 글을 주로 읽었다. 이성이 지배하는 글, 나의 의지박약을 탓하는 글, 각성하지 않으면 져버린다고 경고하는 그런 글들이었다. 책 밖의 세상도 차가운데, 미색 종이를 손끝으로 어루만지면서도 그런 감정을 느껴야 하다니.


며칠간은 지하철에서 박완서 에세이 <사랑을 무게로 안 느끼게>를 읽었다. 나만의 세상을 만들어 보겠다고 귀에 에어팟을 꽂고 재즈 플레이리스트를 재생했다. 사실 남자친구와 나눈 말이 좀 더 있었다.


"국어 선생님, 박완서는 현대소설 작가로서 왜 유명해?"

"소설을 잘 써서 유명해!"

"아니, 그니까. 소설을 어떻게 잘 쓰냐고!"

"모름! 그냥 소설을 잘 써서 유명한데 어떻게 더 설명해?"


국어 선생의 멋들어진 이야기가 있다면 사랑을 빌미 삼아 출처를 숨기고 인용해 볼까 했더니 영 도움을 못 받았다. 하지만 내심, 오히려 좋았다. 그게 더 이유가 되는 느낌이랄까. <사랑을 무게로 안 느끼게> 속의 글들을 읽으면서 나도 모르게 책에서 묘사된 시골의 이미지를 색으로, 감각으로, 향으로 떠올리고 있고, 아는 장소는 아는 대로, 모르는 장소는 모르는 대로, 고쳐야 하는 생각과 지켜야 할 선을 따라 그으며 작가의 시선을 따라가고 있는 걸 보면, 역시 소설을 잘 쓰긴 하나보다, 하고 원인을 분석하는 것 따위는 집어치웠다. 그냥 그 생각을 훔쳐볼 수 있음에 기쁨을 느꼈다.


모든 사람이 바쁘고 화가 나 있는 출퇴근 시간의 만원 상자 안에서 내 몸집만큼의 평온이 들어찼다. 재즈 플레이리스트는 꺼버렸다. 세련되고 리드미컬한 재즈보다는, 어쩐지, 이 순간 흘러가는 대로 발생하는 소리들이, 태연하다는 점에서 차라리 더 어울릴 거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관록이 짙은 어른한테 혼이 나기라도 하는 듯, 나와 똑같은 감정을 느끼는 사람과 공감하는 듯 페이지를 넘겼다.


평화롭고 따뜻한 이야기들 가운데 눈에 띄었던 것은 의외로 작가의 솔직함, 열정과 유쾌함이 드러난 대목이었다.


그러자 나는 그만 맥이 빠졌다. 나는 영광의 승리자의 얼굴을 보고 싶었던 것이지 비참한 꼴찌의 얼굴을 보고 싶었던 건 아니었다. (중략) 아무도 그에게 관심을 갖지 않았다. 나도 무감동하게 푸른 유니폼이 가까이 오는 것을 바라보면서 저 사람은 몇 등쯤일까, 20등? 30등? 저 사람이 세운 기록도 누가 자세히 기록이나 해 줄까? 대강 이런 생각을 했다. 그리고 그 20등, 아니면 30등의 선수가 조금쯤 우습고, 조금쯤 불쌍하다고 생각했다. 푸른 마라토너는 점점 더 나와 가까워졌다. 드디어 나는 그의 표정을 볼 수 있었다. 나는 그런 표정을 생전 처음 보는 것처럼 느꼈다. 여직껏 그렇게 정직하게 고통스러운 얼굴을, 그렇게 정직하게 고독한 얼굴을 본 적이 없다. 가슴이 뭉클하더니 심하게 두근거렸다. 그는 20등, 30등을 초월해서 위대해 보였다. 지금 모든 환호와 영광은 우승자에게 있고 그는 환호 없이 달릴 수 있기에 위대해 보였다. 그는 지금 그가 괴롭고 고독하지만 위대하다는 걸 알아야 했다. 나는 용감하게 인도에서 차도로 뛰어내리며 그를 향해 열렬한 박수를 보내며 환성을 질렀다. (중략) 내 고독한 환호에 딴 사람들도 합세를 해 주었다.

- <사랑을 무게로 안 느끼게> p. 165 꼴찌에게 보내는 갈채


다수의 보통 사람에게 묻혀있던 이가 무언가 뜨거운 사명감을 느끼고 타인에게 귀인이 되는 순간의 감정들이 나에게도 차오르는 것 같았다. 사실 꼴찌에게 감정 이입을 하게 될 거라 생각하며 펼친 페이지였는데, 의외로 작가에게 이입해 마음속으로 박수와 환호를 보내고 있는 나를 발견했다.


그래 도전을 하려거든 철저히 해라. 속 빈 강정인 기성세대에게 너희들의 알찬 내실로 맞서거라. 팝송을 들으면서라도 좋으니 지독하게 공부하고 밤새워 명작을 읽고 진지하게 고민하거라. 그리고 답답한 일이 있거든 답답해하거라. 답답한 것과 맞서거라. 답답한 것을 답답한 줄 모르는 바보야말로 구제할 길 없는 바보가 아니겠는가.

- <사랑을 무게로 안 느끼게> p. 212 답답하다는 아이들


이 대목에서는 단락의 처음으로 돌아갔다가 마지막까지 돌아오는 일을 대여섯 번 반복할 수밖에 없었다. 사람들은 종종 답답해할 것에 답답해하지 않고, 답답해하지 않아도 되는 것에 답답해한다. 그 가운데 눈에 띄는 존재가 있다면, 그 어디에도 답답해하지 않은 채 그저 순응하는 부류의 사람들이다. 내 얘기이기도 하다. 어떤 때는 내가 뭐 하러 이렇게 답답함을 느끼나, 그런다고 변화가 생기기는 하나 하면서 나 자신에게 현실적으로 생각하라며 꿀밤을 때려준다. 그러다 보니 포기하는 것도 생겼고, 여러 해 동안 형성되었을 가치관에도 희뿌연 안개가 꼈다. '너는 옳은 것을 옳다고 말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을 받는다면 '그보다, 옳은 건 어쩌면 없는 건 아닐까요?' 하는 이도저도 아닌 밍밍한 대답을 하고 앉아 있을 것 같은 거다. 답답해하는 것을 멈추고 순응한다고 해서 달라지는 것은 없었다. 그런 것들을 잘 이용하여 나의 실속을 챙기는 법도 몰랐다.


그런 의미에서 도전을 하려거든 철저히 하고, 답답한 것을 답답해할 줄도 알아야 한다는 말은 위안이었다. 글을 읽으며 느꼈던 건 작가님은 강하다는 거였다. 솔직함으로 말미암은 강인함이었다. 누군가는 시비가 걸릴까 봐 꽁꽁 숨길 만한 이야기도 내놓고, 누군가는 눈여겨봐 둘 약점도 드러내고, 강인함은 역시 내가 느낀 것을 솔직하게 받아들이는 것으로부터 비롯되는 거겠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박완서 작가의 이야기를 읽으면서 나는 때로는 자식이 되었고, 때로는 학생이 되었고, 노동자가 되기도, 그저 지구인이 되기도 했다. 글을 읽으며 다양한 내가 되는 게 재밌었다. 희한하게 그냥 작가의 이야기를 두런두런 할 뿐인데, 위로를 받는 기분인 건 나뿐만이 아닐 것 같다. 일관성도 없고 나약하기도 하고 조금은 이상한 구석이 있는 평범한 사람들에게, 하지만 늘 고민하고 허술한 답이라도 찾아내는 사람들에게 작가님의 글들이 은근히 젖어드는 위로가 될 거라 확신한다.




* 출판사로부터 소정의 지원을 받아 작성한 글입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