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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풀솜 Jun 04. 2024

제사 - 4

分家와 祭祀

만나고 헤어짐은 인간사에서 필연적으로 일어나는 일이다. 살아보면 만나는 것보다 헤어지는 것이 더 어렵다.      

지방에서 살다가 함께 살게 되었을 때 시부모님은 대단히 좋아하셨다. 마당이 딸린 큰 집에 자식 모두 출가시키고 두 분만 사셨다. 부모님에게 장남의 가족이 함께 산다는 것은 더 이상 좋을 수 없는 최고의 선택이었다. 부모님을 모시기 위해 서울로 가야 한다는 남편의 명분이 100% 맞다고 할 수 없지만 틀린 것만도 아니었다. 어쨌든 모두가 좋은데 문제는 나만 구렁텅이로 빠지는 기분이 드는 것은 단지 기분 탓이었을까?     

 

지방에서 올라와 이사한 그날부터 나는 집안일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는 신세가 되었다. 삼시세끼 식사 준비는 기본이고 주말이면 모이는 5형제 가족의 식사, 명절, 생신, 제사.... 7년의 시집살이는 결코 만만하지 않았다. 어느 시점에 큰 결단을 내려야 했다. 큰아이가 중학교에 가면서 우리 가족은 드디어 분가를 하였다.      


분가하는 날 시어머님께서는 제사에 필요한 일체의 도구(제기, 상, 위패..)를 나에게 주셨다. 그것은 이제부터 제사는 큰며느리인 내가 책임을 지라는 무언의 말씀이셨다. 나는 제사라는 형식을 두고 ‘지낼 것인지 말 것인지’ ‘어떻게 지낼 것인지’를 왈가왈부하고 싶지는 않았고 그럴 입장도 아니었다. 처음부터 결정되는 대로 따르겠다는 마음이었기 때문에 순순히 받아들였다.      




“그래, 제사는 내가 지내야지~~”     




합리적으로 생각하면 장남에게 제사를 지낼 의무가 있다면 그만큼의 권리도 있는 것이다. 조선시대 유교사회에서는 제사를 모시는 장남에게 문중에서 땅을 주었다. 하지만 이제까지 장남의 권리보다 의무의 부담을 안고 살아왔고 그날도 언감생심 분가 자체가 죄인 인양 아무 말하지 못했다. 이런 가운데 시어머니께서는 한 가지 현명한 결정을 내리셨다. 형제들에게 제사 비용으로 20만 원씩 내라고 하셨다.    

  

사실 자리 잡고 사는 집에서 20만 원을 내는 것이 무리한 금액은 아니다. 제사를 지내러 오면서 어차피 빈손으로 오지는 않을 것이기 때문에 ‘얼마를 내야 한다’가 정해지면 ‘뭘 사가지고 가지?’ ‘돈을 낸다면 얼마를 내지?’ 등등 쓸데없는 걱정을 할 필요가 없어지기 때문에 제사 지내러 오는 형제들도 마음이 편할 것이다.  

   

나의 입장에서도 제사를 지내는 큰며느리인 내가 모두를 부담할 수도 없고 형제들에게 얼마를 가져오라고 할 수는 없다. 어머님께서 정해 주셨기 때문에 모두가 군말이 없었다. 덕분에 제사를 지내면서 경제적인 부담은 많이 덜었다. 옛날부터 제사상에 올리는 물건은 제일 좋은 것을 사되 물건값을 깎지 않는다는 원칙이 있다. 이는 제사라는 형식을 통해서 참석한 사람들에게 잘 먹이고 물건을 파는 사람에게도 이익을 주도록 해야 한다는 의미다. 덕분에 나는 제사장만큼은 마치 내가 재벌이나 된 듯 편안하게 장을 봤다. 제사상 차리기 위해 받은 돈은 다 쓰는 것이 나의 원칙이었으니까....     




사실 돈 걱정 없이 여유롭다고 제사가 지내지는 것은 아니다. 음식을 준비하고 만드는 데는 많은 공이 들어간다. 우리의 엄마들이 힘들었던 것은 이러한 노고를 누구도 인정해 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는 이 노고를 나 혼자 짊어지지는 않았다. 내가 장을 봐 놓으면 전날 동서들이 우리 집에 와서 함께 음식을 만드는 것을 원칙으로 하였다. 다행히도 동서들 모두 한 시간 거리에 살고 시간적 여유도 있었다. 

     

우리 형제 세 명, 작은집 형제 두 명, 이렇게 다섯 명의 며느리들이 모였다. 일은 혼자 하면 힘들지만 함께하면 재밌다. 처음 결혼해서 어색하고 실수했던 이야기, 아이들 키우는 이야기, 친한 모임에서 일어난 이야기, 그 밖에 사는 이야기 등 오랜 시간 함께 일해온 며느리들은 공유하는 추억도 많았다. 남편들 또한 적극적이었다. 시댁 일을 하러 가는 아내를 위해 운전을 해준다든지 아이들은 봐준다든지 하기 때문에 동서들 모두 남편에 대한 불만은 없어 보였다.      


만약에 이렇게 돈을 보태거나 함께하는 노력이 없었다면 제사라는 형식은 상당히 부담스러워 지금까지 이어오기 힘들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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