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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풀솜 Jun 14. 2024

제사 - 5

30년 넘게 제사를 지내면서....

“큰엄마 집에 오면 마음이 편안해져요. 미국에서 생각 많이 났어요. 오늘 맛있는 것도 많이 먹고 큰엄마 작은엄마들 사촌 동생들도 봐서 좋았어요. 안녕히 계세요.”

“그래. 와줘서 고맙다. 너무 멀리 살아서 이제 보기 힘들 거라 생각했는데... 건강하게 잘 사는 모습을 다시 봐서 좋구나.”

작은집 큰딸이 새해 차례에 참석하고 돌아가면서 나에게 인사를 했다.


작은집 큰 동서에게서 연락이 왔다. 결혼해서 미국에 사는 큰딸이 이번 설에 참석할 거라고 했다. 나는 의아했다. 설을 쇠러 왔으면 자기 시댁에 가야지 친정도 아닌 친정의 큰집 제사에 참석하겠다는 것이 요즘 세상에 흔한 일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조카는 외국에서 생활하면서 명절이면 모두들 모여 차례를 지내고 음식을 먹었던 생각이 많이 났다고 한다. 시댁은 차례를 지내지 않아 여행을 가셨고 남편의 직장 때문에 돌아가야 하는데 이번 결혼 전 분위기를 느끼고 싶어 남편을 먼저 보내고 큰집에 왔다는 것이다. 


이 이야기를 들은 나는 보람되고 기뻤다. 그동안의 제사를 준비하면서 수고로웠던 생각이 모두 없어지고 마음이 찡했다. 나는 30년 이상 제사를 지내왔다. 시어머님께서 제사를 물려주시고 이제까지 내가 어떤 마음으로 제사를 지냈는지 앞으로는 어떨 것인지 혼란하던 시기 아, 하고 머리를 치게 만드는 사건이었다. 


제사를 모시고 돌아가는 길 시동생들은 수고했다는 인사와 함께 힘들게 음식을 준비해서 제사 지내는 것을 고려해 볼 때가 되지 않았나 간접적으로 이야기한 적도 있다. 종교적 문제로 혹은 생활방식의 변화로 명절에 모두 모여 제사를 지내는 풍습이 많이 사라졌다. 음식 준비, 형제간의 갈등, 너무 멀리 떨어져 있어 참석하는 것조차 어려운 경우도 많다. 친척들이 모이면  '공부는 잘하냐?' '취직은 했냐?' '언제 결혼하느냐?' 등 이야기 듣는 것이 스트레스라 참석하기 싫다는 젊은이들도 많다. 개인적으로 힘들고 불합리한 면이 있다는 현실을 모르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나는 형제가 모여 밥 한 끼 먹는 이 시간이 너무 소중하다고 생각한다. 


형제는 고사하고 이웃들 간에도 남의 집에 가는 것, 남이 우리 집에 오는 것이 어려운 문화로 바뀌었다. 서로의 연결 끈이 사라지고 있는 이 시점에 오래 유지해 온 우리의 전통을 일부러 그만둘 수는 없었다. 내가 조금만 힘들면 일 년에 몇 번은 모여 식사 한 끼는 할 수 있는데.....


이 시대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제사를 지내지 말아야 할 이유는 차고도 넘친다. 그러나 어렵게 이어온 전통을  그만두면 다시 살리기는 불가능하다. 그것이 내가 이것을 유지하는 이유다.





우리 시댁은 이북에서 피난 오셨다. 아버님의 고향은 개성이다. 고향에서 시아버님의 부모님은 5형제를 두셨다. 그중 둘째인 아버님은 동생과 두 분만 남한으로 내려오셨다. 그래서 두 분은 각별하셨다. 두 집안은 명절을 함께 보내시고 할아버지 할머니 제사를 모셨다. 우리가 장남이기 때문에 그 제사가 우리에게까지 이어졌다. 따라서 작은 집의 자손들도 우리 집에 와서 함께 제사를 지내고 명절을 보냈다. 출가한 여자 형제를 제외하면 우리 3형제와 아이들, 작은집 2형제와 아이들, 합하여 명절이면 25명 이상 함께 차례를 지냈다. 


 준비는 거의 우리 집에서 이루어졌다. 설날 차례상에 놓을 김치는 김장 때 익혀서 따로 보관했다. 나박김치는 명절에 임박해서 담았다. 그 밖에 모든 재료 준비를 위해 장을 보고 손질해 놓고 명절 전날 동서들이 와서 함께 음식을 만들었다.


명절 전날이면 며느리들이 모여 음식을 만들었다. 시부모님들이 살아계실 때는 개성 사람들이 아름아름 음식재료를 파는 곳을 아셔서 구해 오시기도 했다. 그러나 우리 세대에서는 그분들도 돌아가시고 멀리 가서 재료를 사 올 정도로 열정은 없어졌다. 대신 한창 아이들이 자라면서 음식의 양을 많이 했다. 한 가지라도 양을 많이 만들어 함께 먹고 싸주면 동서들이 좋아했다. 홍해삼이나 북어 전을 냉동실에 넣어놓았다가 아이들이 학교에서 돌아오면 바싹 데워서 케첩을 찍어 먹으면 간식으로 최고라고 했다. 


많은 사람이 모이는 만큼 나는 음식을 많이 장만했다. 제사 음식은 지금 먹는 음식과 조금 달라 준비하기도 번거롭다. 재료나 조리법이 오래전부터 내려왔기 때문에 옛날 방식대로 만들어야 하고 지방색이 강하다. 우리 시댁은 개성에서 내려오셔서 개성식으로 차린다. 개성 음식은 화려하고 고급스럽다. 고려시대 수도였던 지역이라 부유하고 세련된 전통이 남아있다. 


처음 제사를 지낼 때는 일이 많아 너무도 힘들었다. 음식을 만드는 것이 손에 익지 않아 그러지 않아도 힘든데 어머님은 뭐 하나 허투루 넘기지 않으셨다. 우리 맘대로 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셨다. 분가해서 우리 집에서 제사를 지내면서 일은 많았지만 내가 할 수 있는 부분이 많아졌다. 제사를 지내는 것이 한결 수월해졌다. 


제사 음식은 복잡하더라도 항상 같은 음식을 준비하니 손도 빨라지고 점점 수월해졌다. 며느리들 각자 잘하는 부분이 있어 나물은 작은 동서가, 홍해삼은 막내 동서가, 전을 부치는 것은 작은집 동서들이 하는 식으로 점점 분업화되었다. 




시간이 지나니 상황이 변했다. 부모님이 돌아가시고 아이들이 결혼하고 공부하느라 해외에 나가면서 제사를 지낼 인원이 확 줄었다. 형제들의 합의하에 부모님의 기제사는 절에서 모시기로 결정했다. 우리가 전원주택으로 이사 오면서 명절 전날 함께 음식을 하는 일도 자연히 할 수 없게 되었다. 나는 제사는 꼭 이렇게 해야 한다는 형식을 고수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부모님이 살아생전 드셨던 음식을 함께 먹으며 돌아가신 분들을 생각하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명절날 제사는 지금도 계속된다. 음식을 많이 만들지도 않고 특히 전날 동서들이 모여 함께 음식을 만들던 전통도 지금은 하지 않는다. 동서들은 지금까지 해 왔던 음식을 한 가지씩 만들어 와서 차례상에 놓는다. 워낙 힘들게 음식을 준비해 왔었는데 이 정도는 즐거운 형제 모임 정도로 생각한다.  


나는 전통과 문화는 지속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물론 시대에 따라 상황에 따라 새로운 문화와 전통이 만들어지겠지만 불편하다고 힘들다고 지금까지 이어온 전통을 거부하는 것은 전통이 가지는 순기능조차 하루아침에 잃게 된다. 


제사를 보고 자랐던 아이들은 그 기억할 것이다. 어린 시절 찾았던 큰집의 차례상, 어른들에게 올렸던 세배, 함께 둘러앉아 먹었던 음식들은 그들의 속에 있다. 이것이 결국은 그들이 살아가는 힘이 될 것이다. 미국에 사는 조카가 제사에 참석을 위해 우리 집을 찾은 것이나 직장 때문에 멕시코에 사는 시동생이 한국에 왔을 때 너무나 반가웠다.   


동서의 카톡에는 명절에 먹었던 개성편수 사진이 실려 있다. 먼 이국땅에 살면서 고국의 형제들과 먹었던 음식이 그곳에서도 만들어 먹는 모양이다. 성과 본이 같아 같은 조상을 모신 사람들이 모여 고유한 음식을 나눠 먹는 것이 제사의 주된 목적이다. 제사라는 형식이 그들의 마음에 위안이 되었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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